한국일보

독서칼럼 - ‘간결의 미학과 상상력’

2022-01-03 (월)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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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문체 미학을 분석할 때 간결과 율동의 미학은 확실한 특징이 된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을 비롯한 현대회화기법의 도입으로 헤밍웨이의 빙산이론이 성립되었다. 빙산이론의 핵심은 간결과 율동의 미학, 여백의 언어, 침묵기법, 압축과 확산, 조절된 생략 기법 등이다.

소설의 강력한 힘은 사람이 본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는 자신을 묘사하여 내부에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간결하게 표현하는 데 있다고 헤밍웨이는 믿었다. 헤밍웨이는 많은 자세한 부분은 생략해 버리고 단순한 표현으로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인 문체를 구사함으로 간결하고 정직한 산문을 쓸 수 있었다.”(소수만의 ‘헤밍웨이의 작품세계’ 중에서)

좋은 글은 주어, 동사, 목적어가 분명한 문장이다. 주술 관계가 분명할수록 글은 간결하게 써질 것이고 문장 전체에 역동적 에너지가 흐른다. 주술관계를 희석시키는 형용사, 부사, 대명사, 접속어 등을 전략적으로 제거하고 나면 건강하고 진실한 문장이 형성된다.


저명한 포도원 명장은 잘 익어 매달린 멀쩡한 포도 열매를 전략적으로 포기하는 일에 탁월하다. 이것을 ‘그린수확(green harvest)’라고 한다. 포도 열매 색깔이 보라색으로 익어 가기 전에 과감하게 잘라 내 땅에 떨어뜨려 포기한다. 그린 수확의 첫째 목적은 최고의 당도와 향기를 품은 극상품 포도를 생산하기 위함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농부는 생산량을 철저하게 제한한다.

글쓰기도 포도농사법과 같다. 좋은 문장을 지어내려면 단어와 품사를 덧붙이기 보다는 오히려 뺄셈을 잘하는 데 있다. 뺄셈은 화폭을 단순화해서 추상성을 강조하고 돋보이게 하는 그림 그리기 작업과 비슷하다. 덧붙이기가 대상에 대한 묘사 설명의 구체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뺄셈은 극히 절제된 상징과 상상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전략적 포기를 거친 상징과 상상력의 획득은 포도농사 뿐 아니라, 문장, 그림, 음악, 예술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에 막강한 영향을 끼친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전략적 포기와 상상력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신앙은 생명력이 없고 무미건조하다. 거기엔 믿음의 진실성, 헌신의 열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유진 피터슨(Eugene Person)은 말했다.

“폐허로 변한 이 세상에서 기독교가 해야 할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거룩한 상상력을 회복하고 발휘하는 것이다.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는 언제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넘치는 시대였다. 상상력은 영적인 요소와 물질적 요소, 비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도구다.”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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