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웨체스터 이야기/ ‘이니스프리’

2021-09-22 (수) 노려/ 한국일보 웨체스터 전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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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한시간 거리에 있는 ‘이니스프리 가든’에 다녀왔다.
계절에 맞추어 이 지역의 가 볼만한 관광지를 알려주는 기사를 쓰면서, 될수록 확실한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 꼭 그 장소를 가본다는 원칙을 세웠었다.

어느 해 여름 ‘이니스프리(Innis free)’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나 젊었을 때 한 번쯤은 읊어 봤을 예이츠의 시. ‘나 일어나서 이제 가리라/이니스프리로 가리라’의 그 이니스프리란 말인가? 웨체스터에 그런 곳이 있다고? 당장 구글 했다. 아름다운 호수 사진 만으로도 아일랜드 어느 외딴 시골의 이니스프리 호수가 연상되는 아름다운 공원 같았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그 때 당장 일어나 ‘이니스프리 가든’에 가 보지 못한 채, 신문 마감일에 맞추어 원고를 써 보냈었다.

“웨체스터 카운티 북쪽 밀부르크(Millbrook)에 위치하고 있는 ‘이니스프리 가든 (innisfreegarden.org)’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에 꼽힐 정도로 잘 가꾸어진 자연 경관을 갖추고 있다.(중략) 4월 말부터 10월까지, 수요일-일요일: 오전 10시~ 오후 4시(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오전 11시~오후 5시) 공개되며, 입장료는 8달러(시니어 5 달러). 이니스프리 가든 멤버와 3세 미만 어린이는 무료, 매달 토, 일요일에 가이드 투어가 있다”는 것으로 기사는 끝, 최소한의 확실한 정보만 제공한 것이다.


얼마전 기후변화가 불러 일으킨 물난리로 뒤숭숭함도 가라앉힐 겸, 뉴스마다 치열하게 다투는 마스크다 아니다, 3번째 백신 맞느냐 마느냐로 혼동스런 마음도 달랠 겸, 그야말로 “나는 가리라!” 작정을 하고 ‘이니스프리 가든’을 찾아 갔다.

안내소에서 준 지도를 보며 잘 닦여진 길을 따라 호수가로 내려가면서부터, 부풀었던 마음이 줄어든다. 예이츠의 시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면서도, 이 넓은 숲을 사들인 부자는 하버드를 나온 정원 디자이너를 고용해, 예이츠가 가고 싶어한 곳과는 정반대로 정원을 꾸며 놨다. 중국식에다, 일본 정원 분위기까지 도입을 해, 죄없는 자연에다 한 구석도 남기지 않고 온갖 기교를 가한 것이다. 중국이건 일본이건 그 나라의 산세와 그 나라의 정서가 합해져 이루어낸 정원의 겉 모습만을, 밋밋한 미국 자연 속에 억지로 구겨넣은 느낌. 인공 폭포와 인공 분수며, 정교하게 쌓은 돌 담과 돌 층계, 여기저기 놓여진 돌 조각품들이 어색하기만 했다.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했기에 우산을 들고 갔다가, 살살 내리는 이슬비에 공연히 우산을 펴 들었던 것이잘못이었다. 진흙 바닥에 미끄러졌다. 물가의 풀 하나도 미리 계획한대로 바로 그 자리에 심어졌다는, 명실공히 그림같은 호수의 건너편을 바라보며 걷다가, 며칠 전 퍼부은 빗물에 더 질척거린 땅에서 미끄러진건 당연하다.

크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인 줄 알았던 한 쪽 다리가 그 날 밤부터 시큰거렸다. “일어나서 가리라” 하는 데에도 젊은 혈기가 필요 했었나 보다.

지금은 억지로 낭만을 부려 볼 때가 아니다. 그 보다는, 묘비명에 쓰여졌다는 싯귀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차가운 눈길을 던져라/ 삶에, 그리고 죽음에 / 말탄 자여 지나가거라!
세상을 달리던 말에서 내려와 삶과 죽음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이니스프리 호수 작은 섬에 깃들여 있을지도 모르는 차가울 정도의 지극한 평화스러움을 바랄 때가 아닐까.

<노려/ 한국일보 웨체스터 전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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