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하기 싫은데 어디가서 짜장면이나 사 먹을까? 어디로 갈까, 뉴저지? 아니면 플러싱? 차가 밀리면 아마 한 시간은 잡아야 할 텐데, 요새 가스 값도 올랐고 그 비싼 톨비… 짜장면 한그릇 먹자고 거기까지, 관두지. 집에 있는 걸로 한끼 때우지 뭐. 수 십년간 수 없이 반복된 장면이다.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집 문을 나서 몇 블럭을 걸어가면, 감자탕 집, 횟집, 즉석김밥집, 치킨 집이 있고, 길 건너면 미용실, 떡집 그리고 뭐든 한국말로 물어볼 수 있는 컴퓨터 전문점, 전기기구점이 있고 장터같은 한국식품점이나 어마어마한 중국 식품점이 있는 곳. 또는, 집 앞에 오래 된 델리가 있고, 희귀한 책을 파는 책방, 예쁜 부티크, 민트향 물씬한 모히또를 맛볼 수 있는 캐주얼한 바가 있으며, 몇 블럭을 걸어가면 뮤지엄이나 극장은 물론, 카푸치노 한잔 시켜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앉아있을 수 있는 카페는 골목마다 있는 곳….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은 꿈이다.
1982년도에 미국에 와 잠시 맨하탄에 살다가 결혼하여 웨체스터에 자리 잡았다. 어쩌다 플러싱에 가면, 이발소, 미용실 가고 짜장면 먹고, LA갈비와 콩나물 파 배추 무우를 차 트렁크에 잔뜩 싣고 오면서, 우리도 플러싱 살면 좋겠다 했었다.
맨하탄에 한번 나가는 일은 여행이나 다름이 없다. 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야 하고, 시간 맞추어 기차를 타고 맨하탄엘 가면 다시 서브웨이로 목적지엘 가곤 한다. 은퇴하면 맨하탄에서 살아야지 했었다.
팬데믹 전 해에 한국을 세 번 다녀왔다. 90세 어머니가 결국 요양원에 가셔서 3월에 갔었고, 10월에 어머니도 뵐 겸 경주 문학 행사에 참석하고 온 지 두 달도 못되어 12월엔 어머니 장례식으로 또 한국에 갔다.
서울이나 경주나 어딜 가나 붙어있는 문화센터의 프로그램 포스터. 시 낭송대회, 그림과 노래와 영어공부와 도자기 만들기, 요가, 춤추기. 백화점이나 마트에서나 주민 복지회에서나 항상 특별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다. 어딜 가나 기상천외한 먹거리로 골목 골목이 꽉 차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요즘은 팝 문화로 세계를 매료시킬 뿐 아니라 런던과 파리의 유명 갤러리들이 청담동이나 한남동 등에 앞을 다투어 문을 열고 있어서 서울이 세계적인 아트의 중심지가 되어간다고도 하니, 한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이 모든 것이 여기 웨체스터에서는 어림도 없다. 부촌이라고 알려진 웨체스터는 가는 곳 마다 울창한 숲과 호수가 그림같다. 주택가 마당마당에 온갖 나무와 만발한 꽃은 과연 식물원을 방불케 한다. 무척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그래서? 뭐가 좋다는 것인가.?
학군이 좋다고? 사실 몇 명만 좋다는 대학에 가고 나머지 학생들은 미국내 수 많은 대학으로 흩어지는 건, 슬럼가가 아니면 어느 지역의 학교나 다 비슷하지 않을까. 엘리트 학부모들이 아이들 통해서 서로 인맥을 맺는다고들 하는데, 우린 역부족이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사고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낸 한인 1세대 이민자들이 백인 이웃과 ‘하이’ 인사를 주고 받는다 해도, 결국은 한인 교회에 와서야 마음이 편하다.
생기가 도는 곳에서 재미있게 살고 싶은 마음은 나뿐이 아닌가 보다. 가까이 지내던 친지들이 활기 있는 노후를 위해 한 집, 두 집 강건너 뉴저지로 멀리는 애틀랜타로 이주를 해 간다.
누구는 우주여행을 하고 싶었던 어린 시절 꿈을 72세에 멋지게 이루어 냈는데, 살고 있는 자리를 조금만 움직이면 되는 꿈을 나는 아직껏 못 이루고 있다.
지금처럼 한가한 오후, 너무나 심심한 여기 말고, 짜장면 먹고 싶으면 언제라도 쉽게 먹을 수 있는 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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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려 /웨체스터 전 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