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 -나의 어머니의 6월은…

2021-06-25 (금) 김재열/뉴욕센트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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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말도 마라! 엄마는 매년 6월달만 되면 코에서 시체 타는 냄새가 난단다!”
공포 영화 얘기 같은 말로 시작된 우리 어머니의 6월은 당신 생애의 상상밖의 공포와 비극으로 얼룩진 시간들이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지… 니 아부지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런 연락도 없지…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소식 한 통 없었으니…”

1948년 내가 첫 돌이 가까왔을 때 우리 아버지는 지리산 밑자락 구례군 토지면에서 경찰 지서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때는 여순반란 사건으로 정부군들의 진압으로 빨치산 잔당들이 지리산으로 숨어 들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빨치산들의 주적이었던 경찰관으로 임무를 감당해야 했었다.

낮에는 국군의 통치와 밤에는 빨치산들의 통치가 매일 반복되는 치열한 현장에 근무하러 나간 아버지는 소식이 없었다. 겨우 20대 초반의 어머니는 첫 돌을 맞는 아들 하나를 끌어안은 채로 텅 빈 지서장 관사를 지켜야만 하셨다.


언제 지서장 관사에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는 고향 땅 순천을 향해 몇 날 며칠을 문전걸식을 하면서 돌아가야 했다. 순천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정부군이 진압하여, 지역 빨갱이들을 색출하면서 즉석 재판과 처형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반란군에게 희생 당한 시체 곁에 이제는 정부군에 의해서 처형 당한 시체들까지 보태어져 시가지 군데군데에서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서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남편의 시체가 저 송장들 속에 있다면… 시체라도 찾겠다는 일념으로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나섰다.

어머니는 장작더미처럼 뒤엉킨 시체들을 하나하나 확인 작업에 들어가셨다. 무더위와 간간히 뿌린 소나기로 시체들은 풍선처럼 부풀었고, 악취로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의 목표는 오로지 남편의 금이빨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두 손가락으로 굳게 닫힌 시신들의 입술들을 열어 젖혀야 했다. 금 이빨은 쉽게 어머니 눈에 띄지 않았다. 시체들의 입술에서 손가락을 떼는 순간에는 입술의 피부들이 접착제가 묻어나듯 두 손가락에 달라붙곤 했다.

위에 있던 시신을 모조리 뒤져도 금이빨을 발견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속에 깔린 시체들도 확인해야만 했다. 위에 있는 시체들을 치우기 위해서 그들의 손목을 잡아 끌어 당길 때엔 시신들의 손목 피부들이 마치 물고구마 껍질 벗겨지듯이 훌러덩 벗겨져 엉덩방아를 찧어야 하셨다.

순천 남국민학교 운동장에서는 아버지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연고 없는 시체들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불태우는 공동묘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시신은 고사하고라도 징표가 될 금이빨 하나만이라도 찾고 싶었던 어머니의 절박한 심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시체들이 뒤엉켜 타 들어가는 매캐한 연기와 그 역한 악취가 어머니의 코뿐만이 아니라 아들의 코에서도 매년 6월이면 강하게 풍겨져 나온다.

어머니는 내가 말귀를 조금 알아들을 때부터 매년 6월이면 여순반란 사건의 전모를 소상하게 되풀이하시곤 하셨다.
한편 지리산 자락의 빨치산 천하로부터 피신하신 아버지는 야간 남행을 감행하셨다. 허술한 전투화가 너덜너덜 떨어져 나가 성한 발톱이 하나도 없는 극도의 산행 끝에 고향집에 안착하셨다.

아! 그 때의 그 감격을 어찌 우리 잊으랴? 매년 6월이면 되풀이하셨던 어머니도,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으나 이제는 이 아들의 입에서 매년 읊으셨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민족의 비극적인 얘기가 대신하여 쏟아져 나온다.

<김재열/뉴욕센트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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