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앤(Anne)

2020-11-12 (목) 방인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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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책방에서 처음 빌려 봤던 책이 ‘알프스의 소녀’ 와 ‘소공녀’였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내가 책의 세계에 마법처럼 빠지게 된 계기다.

그런데 반백년도 더 지난 후, 코로나19로 상상불허였던 일상의 대 변혁기를 맞게 됐다. 꼼짝없이 ‘집콕’만 하게 돼 예전에 탐독했던 책들까지 섭렵하게 됐다. 그중에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1908년 출간한 ‘앤(Anne of Green Gables)’을 도서관에서 해후했다.

옛날에 번역됐던 ‘빨강머리 앤’과 달리 무려 10권이다. 8권까지는 고아소녀 앤이 입양된 후, 성장, 사랑, 결혼, 그리고 자식들의 이야기다. 말하자면 앤의 일대기인 셈이다. 두 권은 섬 주민들의 주옥같은 짧은 에피소드들인데, 나이에 따라 책을 읽으며 느끼는 시야가 달라선지 새롭다.


무대는 캐나다 동부, 대서양의 세인트로렌스 만에 위치한 반달형의 프린스에드워드 섬이다. 그저 보는 모습 그대로가 그녀 자체인, 상상력 풍부하고 투명한 느낌의 앤은, 따스한 성정, 바른 인성으로 지혜롭게,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주변의 개성적인 등장인물들도 어찌나 아름다운 심장과 뛰어난 영혼의 소유자들인지 절로 가슴이 훈훈해진다.
참으로 예쁜 자연과 더불어 평온한 삶을 영위하던 주민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1차 대전의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친다. 장래가 창창한 청년들 간에도 머나먼 곳의 전쟁이라고 마냥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분위기가 조성된다. 징병제가 아님에도 심리적인 압박과 고뇌를 극복, 결기(決起)에 편승해, 너도나도 전쟁터로 향한다.
앤의 세 아들도 출정하게 된다.

매년 봄마다 먼저 핀 산사나무 꽃을 엄마에게 갖다 주던, 다정다감하고 용감한 젬이 제일 먼저 떠난다. 둘째 월터는 풍부한 감수성과 섬세한 인간성의 소유자로 자연과 시를 사랑하는 문학청년이다. 전쟁에 대한 회의와 두려움으로 내적 갈등에 시달리다 참전을 결정한다. 셋째 아들 또한 출정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전격적으로 비행단에 합류한다.

일시에 모든 일과 생활들이 전쟁과 직결돼 섬 주민들의 일상사가 확 바뀌고 만다. 속속 전해지는 부상자나 전사자의 비통한 소식들! 예상과 달리 질질 끄는 전쟁! 모두들 숨 막히듯 조여 오는 긴장에 피가 마를 만큼 힘들게 하루하루를 감내한다.

심지어 젬의 애인 먼디도 젬이 떠나버린 기차역에서 하루 24시간 불침번을 서며 젬을 기다린다. 월터가 애절하게도 프랑스의 낯선 전장 터에서, 심금을 울리는 고귀하고 절절한 불후의 시를 남기고 용감하게 산화한다. 그런 참극을 겪으며 앤은 물론 주민들 모두가 오로지 전쟁이 빨리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한다. 철저히 파괴된 안온(安穩)한 전쟁전의 일상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젬이 부상당한 몸으로 독일포로수용소를 두 번 만에 탈출, 가까스로 맨 나중에야 귀환한다. 드디어 먼디가 4년 반 만에 기차역에서 잼과 상봉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목사님은 그런 먼디를 보고 “신뢰, 애정, 성실은 어디에 있든 고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이 애정은 보물입니다”라고 했을까!

그렇게 생사를 넘나든 젬이 여동생에게 한 말들이 인상적이다. “전쟁이 일어날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계에 있는 거야. 그것을 우리는 본디 세계보다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만 해. 그것이 앞으로 할 일이야.” “낡은 정신을 쫓아내는 것만으론 부족해. 새로운 정신을 끌어들여야 하는 거야.”

젬의 충언은, 현재 코로나19와의 전쟁으로 소소한 일상을 상실한, 전 지구인들의 갈 길과 바람도 되지 않을까!

<방인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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