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동의 신성성

2020-09-01 (화)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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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은 노동절(Labor Day)이다. 그런 것을 기억하는 이도 드물고 의미를 찾는 사람도 별로 없다. 알프레드 밀레의 명화 ‘만종(晩鍾)’이 있다. 농부 내외가 일손을 멈추고 멀리 울려오는 종소리를 따라 저녁기도를 드리는 장면이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림의 촛점이 사람이 아니라 농기구에 있음을 알게 된다. 본래 이 그림의 제목은 ‘안제러스(Angelus)’ 즉 기도인데 일본 군국주의 시절 기독교의 냄새를 빼기 위하여 만종이란 엉뚱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소박한 농부 내외의 일상생활인 저녁기도를 담아 노동의 신성함을 나타낸 명작이다.

밀레의 명화 중 ‘기도하는 손’이란 유명한 작품도 있다. 흑백으로만 그린 기도하는 손인데 이 그림의 배경이 된 감동스런 이야기가 있다. 밀레는 소년시절 친구와 함께 그림 공부를 위하여 파리로 간다. 그러나 둘이 함께 공부를 하면 먹고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은 일만 하여 생계를 꾸리고 다른 사람은 열심히 그림 공부를 하고, 얼마 뒤에 서로의 역할을 교대하자는 것이었다. 밀레가 먼저 그림 공부를 하였는데 어느 날 밤 우연히 친구를 보니 두 손 모아 자기를 위하여 기도 드리는 그 손이 심한 노동에 시달려 너무나 험해져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친구의 사랑에 너무나 감동을 받은 밀레는 그 기도하는 손을 연필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세계명화가 된 ‘기도하는 손’이다.
영어의 Vocation이란 말은 직업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본래 이 말은 ‘부르심(Calling)이란 뜻이었다. 일은 밥벌이나 돈벌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 곧 신성한 소명임을 알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한다면 혹은 밥을 위하여 일한다면 노동의 신성성은 많이 훼손된다. 소명에 응답하는 행위가 노동이라면 내 생애에 무게가 생긴다. 쉬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사실은 일하는 것이 기쁨이다. 실직자의 슬픔을 생각하여 보아라. 일이 있으면 큰 기쁨이다. 일을 해서 얼마를 번다는 것에 인생의 가치를 걸어서는 안된다.

창세기의 창조 설화에 의하면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추방할 때 가죽옷을 입혔다고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노동복을 입혀 세상에 내보낸 것이다. 그리고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고 선언하셨다. 노동이 하나님의 지시였음을 보이고 있다.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는 노동 필수의 원칙을 내걸었다.

버마에 최초로 들어가 선교한 아드미럼 저드슨 선교사가 있다. 타종교를 전하기 위해서는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국왕을 만났더니 왕은 저드슨의 손을 보고 “그런 손을 가지고는 아무도 당신을 상대하지 않을 거요. 우리 국민과 같은 손을 만들고 나서 선교를 하시오.”하고 말하였다. 저드슨 성교사는 즉시 노동판에 나가 2년을 일하였다. 그의 손은 다른 버마인의 손처럼 몹시 험해졌다.

그리고 나서 선교를 시작하니 버마 사람들이 그의 전도를 잘 받아드렸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손은 묶지 말라.”고 하였다. 그 당시 사체는 손발을 묶어 굴에 안장하였던 것이다. 이 유언의 의미는 온 천하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도 죽으면 빈 손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손은 여러가지다. 주는 손도 있고 받는 손도 있다. 돕는 손도 있고 뺏는 손도 있다. 싸우는 손도 있고 평화의 손도 있다.

테레사 수녀가 수녀가 되기 위하여 집을 떠날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무척 힘들겠지만 예수님의 손을 가져라.” 가난해도 사랑의 손을 가졌던 예수를 닮으라는 교훈이었던 것이다.

<최효섭/목사•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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