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8.15해방과 재미한인사회

2020-08-10 (월) 주동완/퀸즈대 재외한인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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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을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하면 1945년 8월 15일 날 맞이한 ‘8.15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8.15해방은, 한국인들이 20세기 전반기 내내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겪었던 질곡의 역사에서 벗어나 ‘새로 빛을 찾았기’ 때문이다. 8.15해방의 과정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한국민들에게 그 감격과 기쁨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란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8.15해방 75주년을 맞이하여 재미한인사회는 어떻게 8.15해방을 맞이했는지에 대해 찾아보았다. 국가기록원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국에는 한인이 하와이에 6,500명 그리고 미국 본토(특별히 캘리포니아)에 3,000명 가량이 미국 주류 사회와는 고립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뉴욕에는 컬럼비아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한인 유학생을 주축으로 하여 그 외 장사와 노동을 하던 몇몇의 한인들을 포함하여 약 500여 명 정도 있었다. 대략 1만 명 정도의 한인들이 미국에서 8.15해방을 맞이했다. 당시 재미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이승만이 8.15해방을 맞이하는 모습을 통해 재미한인사회는 어떻게 8.15해방을 맞이했는지 엿볼 수 있다.


워싱턴한인회에서 1994년에 발간한 (워싱턴한인사: 1883~1993>와 경향신문 1975년 1월 15일자 비록한국외교(秘錄韓國外交)라는 기획기사에서 이승만이 8.15해방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두 자료의 관련 부분을 필자 나름대로 시간 순으로 다시 배열해서 아래와 같이 재구성해보았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일본 시각으로 8월 15일 정오에 ‘무조건 항복 선언’을 했다. 그 때 워싱턴은 8월 14일 밤 11시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거처로 이용하고 있던 워싱턴 DC의 4700 16th ST.에 소재한 구미위원부 건물 2층에서 일본 천황이 방송을 통해 떨리는 목소리로 항복을 발표하는 뉴스를 들었다. 이 뉴스를 들은 이승만은 그 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

그리고 그는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되도록 빨리 자신이 먼저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프란체스카는 이미 각오하고 있던 터였다.
8월15일 아침 당시 미국무성의 산하기관에서 일하고 있던 김세선이 제일 먼저 이승만에게 달려가 일본의 패망 소식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마침 정원에서 화초에 물을 주고 있던 이승만은 활짝 웃으며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국 국민들에게 알려 줄 성명서를 작성했고, 오랫동안 이승만을 도와주었던 제롬 윌리엄즈 기자를 불러 영문 성명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워싱턴에 있는 한인들이 모두 이승만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이승만은 몰려드는 한인들 30여 명과 함께 구미위원부 뒷뜰에서 축하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축하파티를 마친 후 이승만은 임병직, 장기영, 김세선과 김세선의 처 그리고 다른 측근 몇 명과 함께 밖으로 나와, 일본 패망 소식에 거리로 뛰쳐나와 함성을 지르는 미국 시민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워싱턴 역 근처에 있던 차이니즈 랜턴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동행자들과 8.15해방의 기쁨을 다시 한번 나누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는 그러한 기쁨도 잠시, 한반도를 향해 몰려드는 먹구름에 대해 더 큰 걱정을 했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한반도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당 간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며 5년 후에 한반도에서 벌어질 일을 내다보고 있었다.

<주동완/퀸즈대 재외한인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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