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과하지 마”

2020-08-07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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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75주년을 맞아 1945년 8월15일 히로히토 일왕(1901~1989)의 저들 말로 ‘옥음방송’, 우리에게는 ‘종전 조서’를 들어보자. (2015년 8.15 70년을 맞아 일본 궁내청이 홈페이지에 공개)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것을 통고케 하였다. 미국과 영국 두 나라에 선전포고한 이유도 실로 제국의 독립과 동아시아 전체의 안정을 갈망했기 때문이다.

해외에 진출해 타국이 주권을 빼앗고 영토를 침략하려는 것은 당초 짐의 뜻이 아니었다. ...제국 신민으로서 전장에서 숨지거나 일터에서 순직한 사람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 그리고 유족들을 생각하면 짐의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신국 일본의 불멸을 믿고..미래 건설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


제국주의 일본은 진주만 공격후 3년 8개월만에 항복 했다. 9월2일 도쿄 만에 정박한 미군함 미조리호의 함상에서 항복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그런데 이 천황의 종전 조서에는 항복, 패전, 해방, 독립이라는 말이 한자도 안 나온다. 더욱이 식민지하에 말 못할 고통을 받은 조선인에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없다. 전쟁 책임을 전가하고 패전을 딛고 일본의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가운데서도 일본과 조선은 한몸이라는 내선일체 정신을 고집한 것이다.

히로히토는 1926년 124번째 천황 자리에 올랐고 그해 12월26일 쇼와(昭和)라는 새로운 연호를 쓰게 되었다. 1931년 만주 사변과 1937년 난징 대학살을 묵인했고 악명높은 731부대 창설을 재가하는 등 침략전쟁에 적극 관여했다. 군통수권자인 쇼와 천황은 1946년 1월1일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신이 아닌 인간선언을 발표했다. 상징적 존재인 일왕으로 남았다.

천황의 퇴위 주장도 있었지만 일본의 동요를 염려한 미국의 반대로 법정에는 서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전쟁의 책임이 있다. 해양생물학 연구 등 개인적인 삶을 살다가 88세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그러나 천황의 이름으로 전장에 나선 전범 25명은 1948년 11월12일 전원 유죄평결을 받고 처형됐다.

일본이 전쟁 중에 얼마나 언론 단속을 했는지 국민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선언문이 포츠담 선언이라는 것을 8월15일 이후에야 알았다. 진공 라디오의 잡음과 가늘고 떨리는 천황 목소리에 어려운 언어를 써서 당일 이것이 무언지 몰랐고 16일에야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일본 세론(여론) 조사회가 지난 6~7월 전국유권자 2,059명을 대상으로 태평양전쟁 종전 75주년 관련 우편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일본인 46%가 일본전쟁은 침략 전쟁임을 인정했지만 84%는 “이미 사죄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 등을 침략전쟁임은 인정하나 일본은 전쟁 피해국에 사죄했냐는 문항에 대해서는 충분히 했다 31%, 어느 정도 했다 53%, 충분히 하지 않음이 14%, 기타2%로 도합 84%가 이미 사죄했으므로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위안부, 징용문제는 완전히 해결됐고 2015년 12.28 한일위안부 합의를 했으며 한국 대법원의 2018년 10월 징용피해자 배상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은 또 매 정권마다 사과를 했다고 주장한다.

양국 사법부나 국민의 인식이 천차만별이다. 사과했다, 진정한 사과를 해라, 양국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일본은 절대로 우리가 원하는 사과를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우리 자손에게 무거운 짐을 남기지 말자.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처럼 일본의 대학살과 만행을 고발하는 박물관, 기념비, 추모시설 등을 제대로 만들자. 후세 역사교육 현장이자 관광코스로 개발하여 전세계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자.
광복 75주년을 맞는 8월, 한·일 갈등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사과하지 마.” 이것이 해법의 하나가 될까?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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