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벌새(蜂鳥·Hummingbird) 꿈

2020-07-30 (목) 이태상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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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지성(知性)과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때때로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계시나 예고처럼 우리가 밤에 자다 꿈꾼 대로 같은 일이 생시에 일어날 때 말이다.

가족 형제나 친구 중 그 누가 꿈에 나타나면 그 사람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된 일이 있었고, 딸 셋이 영국 만체스타에 있는 음악기숙학교에 다닐 때 나는 미국 뉴욕에 있었는데 꿈에 애들을 본 다음 날 애들 편지를 받곤 했었다.

이와 같은 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체험해왔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도 신비롭고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을 꾼 적도 있다.


1986년 말 나는 굉장히 높은 산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산꼭대기 정상까지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밑에서 받쳐주고 밀어주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그리고 이 등산 등정(登山 登頂) 코스 내내 아주 작고 예쁜 허밍버드(Humminbird) 벌새 한 마리가 내 얼굴을 마주 보고 미소 짓듯 노래하며 마치 꿀을 먹고 꽃가루를 매개하는 꿀벌처럼 윙윙 내 눈앞에서 제자리걸음 아닌 제자리 비행으로 나를 인도해 주는 꿈이었다.
이 꿈은 지금도 내 기억에 너무나 생생하다.

공교롭게도 이 꿈은 내가 큰 딸 해아(海兒)가 만 18세가 되는 1986년 11월 27일 쓰기 시작해서 내가 만 50세 되는 1986년 12월 30일 장문의 편지를 끝맺은 날 밤에 꾼 것이었다.

나는 첫 아이로 쌍둥이 딸을 보았었다. 태어난 지 하루 만에 한 아이는 숨지고 한 아이만 살아남았다. 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두 딸 애들 이름부터 지어놓았었다.

한 아이는 태양처럼 언제나 빛나고 만물을 육성하며 희망을 주는 아이가 되라고 태양 ‘해’ 자(字), 아이 ‘아(兒)’ 자(字) ‘해아,’ 또 한 아이는 바다처럼 무궁무진한 삶의 낭만이 넘치는 아이가 되라고 바다 ‘해(海)’ 자, 아이 ‘아(兒)’ 자(字) ‘해아(海兒)’로.
아마도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숨진 ‘해아’가 내 꿈에 벌새로 나타났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이 벌새 꿈을 꾼 다음, 내 첫 저서 ‘해아야, 코스모스바다로 가자’를 비롯해 전혀 생각하지도 꿈도 꾸지 않았던 책을 20여 권 내게 되었으리라. 자연 만물 중에 벌새야말로 시(詩)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이 시(詩)같은 ‘벌새’가 존재하리라.

<이태상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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