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성할 때

2020-06-25 (목) 이상민/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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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민이 한참이었던 70년 대 말 경의 이야기다. 한인여성 A 씨가 뉴욕 브롱스에 있는 델리가게를 샀다. 잔금을 치르고 열쇠를 받던 날 전 주인이 중요한 걸 가르쳐 준다며 현재 일하고 있는 흑인 직원 토니(가명)를 꼭 데리고 있으라 했다. 주인인 자기보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무슨 물건이 더 필요한지 훨씬 더 잘 알고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라 한다.

그 주인 말대로 일은 참 잘하는데 지각을 하기가 일쑤고 곤조를 부리면 무단 결근도 쉽게 하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해서라도 자기가 비운 시간은 채우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A 씨는 늦은 시간에 카운터 뒤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소리를 쳤다. “아줌마! 엎드리세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토니가 괴한을 덮치고 제압을 하고 있었다. 괴한은 흉기도 들고 있었는데 토니를 겨우 뿌리치고는 얼른 뛰쳐나가 줄행랑을 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떨리는 가슴을 겨우 안정시키고 나니 좀 전에 분명 한국말을 들은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Tony, do you speak Korean?” 하고 물으니 ‘네’ 라고 답을 한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니 어머니가 한국사람이라고 하는데 한국말에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그래서 왜 여태 안 알렸냐고 물으니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를 보시던 첫 날부터 깜둥이새끼라고 부르시기에 무안해 하실 것 같아 가만 있었습니다.” A 씨는 당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한다.

기분이 나빴을 텐데 왜 그만두지 않았냐고 하니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미국에 오자마자 아버지는 가정을 버렸고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현재 암투병 중인데 간호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한다. 어떤 날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야 하고 약을 사다드리기도 해야 해서 결근도 하고 지각도 많이 했는데 자기를 해고하지 않은 아주머니가 고마워서 일을 할 때는 더 열심히 했다는 거다. 피부색깔로 사람을 무시하고 살아온 세월이 정말 부끄럽고 후회스럽다고 A 씨는 말한다.

요즘 인종차별에 대한 뉴스가 매일 나오는데 이 문제는 과연 흑인과 백인 사이에만 있는 것일까? 인종차별 이슈가 심각한 요즘 동승해서 흥분만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A 씨는 아닌지 자성할 때인 것이다.

<이상민/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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