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상생의 철학

2020-06-22 (월) 최효섭 / 아동문학가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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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세계의 강자들은 남의 땅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호황을 누렸다. 강대국이라고 일컫는 나라들이 대개 그런 나라들이다. 모든 제국주의가 쇠퇴의 길을 밟았다.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행복하지 않다. 서로 잘 살아야 행복이며 혼자 잘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상생(相生) 곧 서로 잘 사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나누어 가지면 배가 되는 것이 세상이다. 그런 뜻에서 예수는 “오리를 동행하여 달라는 사람에게 십리를 동행하여 주어라.”고 가르치셨다.

앗시시의 성자로 불리던 프란시스가 어느날 설교하러 나간다고 해서 제자들이 따라 나셨다. 그러나 프란시스가 그 날 한 일은 거리에 앉아 한 가난한 노동자의 신세 타령을 들어준 일과 과일을 수확하는 사람들의 일을 조금 도운 일과 가게에 들어가 점원과 잡담을 나눈 것 뿐이었다.

제자들이 실망하여 물었다. “오늘 훌륭한 설교를 들을 줄 알았는데 설교는 한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프란시스가 반문하였다. “오늘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설교를 열 번이나 하였느니라”. 프란시스는 사랑의 행동으로 설교를 하였던 것이다.


상생의 철학은 곧 사랑의 철학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의심을 버리고 신뢰하는 것이다. 저주를 보류하고 축복하는 것이다. 공격의 화살을 늦추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판하기 보다 감사를 먼저 하고 섭섭한 생각보다 용서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며 남을 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뛰어드는 것이 상생의 원리이다.
예수가 인류에게 유산으로 남긴 말씀이 있다. “내가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준다. 마음에 두려워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아라.”(요한복음 14:27) 평화가 곧 예수의 유산이었다. 대립과 싸움이 있다면 그 교회 그 사회는 이미 예수의 정신과는 멀어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패전 국가 일본에 상륙하기 전에 그 분이 존경하던 일본인 한 사람을 미즈리 군함에 불렀다. 일본을 대표하여 미국 군정장관 맥아더 장군을 만난 사람은 동경 시나가와 빈민굴에서 빈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가가와 도요히꼬 (賀川豊彦)였다.

맥아더 장군이 “내일부터 내가 일본의 군정장관으로서 정치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자 가가와 목사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일본의 잘못이나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마시오.”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모든 인간이 귀중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라는 충고였던 것이다.
상생의 원리는 지루할만큼 오랫동안 참는 것이고, 경쟁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상생의 원리는 도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중하는 것이고 결코 이익을 위하여 취하는 행동이 아니다. 상생의 원리는 한없이 겸손하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살기는 매우 힘들지만 어느 수준에라도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상생의 길이다.

내가 존경하던 이연호 목사님이 계시다. 그 부인은 의사였는데 개업하여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이연호 목사와 함께 한강 빈민굴에 살며 구호품과 의약품들을 기증받아 평생 빈민의 친구가 되고 그들의 병을 치료하여 주었다.

내가 보기에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런 사람을 돕거나 칭찬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또 한 사람, 나에게 위대한 인물로 보였던 사람은 나의 친구 황광은 목사이다.
그는 부모 없는 넝마주이 아이들의 친구가 되고 아버지가 되어 돌보아 주었다. 위인전이 있다면 마땅히 들어가야 할 사람들인데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최효섭 / 아동문학가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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