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날 갑자기

2020-06-05 (금) 방인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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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인류가 상상조차 못했던 천하무적이 출현했다. 꽃처럼 예쁜 형상과 달리 가공할 위력의 코로나바이러스! 온 지구인들은 육안으론 나타나지도 않아 더 치명적인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적 앞에 힘없이 백기를 들었다. 도도하게 흘러가던 전 세계인들의 삶이 핵폭탄에 맞은 양 풍비박산됐다. 나 역시도 균이 잠복했을지도 몰라 손자도 못 안아보게 됐다. 또 그 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나이라 위험하다며 수퍼도 못 가게 딸과 아들이 생필품 일체를 배달하고 있다.

생활 패턴이 그렇게 바뀌고 집에만 있게 되자, 기저에 깔린 불안함에 맥만 빠졌다. 면역력증강에 운동은 필연이라 동갑내기 친구 둘과 의기투합했다. 아직은 각자 취향인 요가, 수영, 골프, 라인댄스와 병행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산행했다. 그런데 모든 게 올 스톱됐고 오직 산만 문호가 개방된 터. 우린 사람들을 피해 매일 새벽 먼동이 트기 전 출발해 2시간 남짓 산행을 하고 있다. 그것도 도둑괭이마냥 조심스러워 의식적으로 거리를 둔 일렬종대로 걷는다. 꼭두새벽이라 산을 전세 냈다가 파킹장에 와서야 Early Bird 들이 한두 명 나타난다.

처음 산행 땐 겨울의 끝머리라 나목들과 침엽수, 철쭉과의 만병초들만 푸르게 산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바이러스에게 시위라도 하는 듯 매화, 개나리를 선두로 능금과 교목의 산사나무, 보리수, 인동 등, 꽃들의 행진이 시작됐다. 자연은 변함없이 순서대로 피고 지며 바이러스에 의연하니 장하고 부럽다. 유독 인간세상만이 난공불락의 바이러스 횡포에 속수무책 무참히 휘둘리고 있는 셈이다.


음울하고 무기력하게 보내던 시간들이, 꽃구경에 취할 적엔 잠시 밝고 탄력 있던 옛 시간으로 착각된다. 이제야 절절이 인지된다. 아무 제약 없이 마음껏 취미생활하며,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나 식사하고 환담하던 시간들. 덤덤히 가볍게 누려왔던 그 일상들이 참으로 소중한 선물이었다고. 인간들끼리 일말의 경계나 불신감 없이, 허심탄회하게 손잡고 포옹하던 시간들이 큰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간혹 산책객, 산악자전거족, 조깅족들과 트레일에서 마주치게 된다. 그럼 서로가 질겁하며 턱에 걸쳤던 마스크나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며 사회적 거리 몇 배만큼 확 비켜선다.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 움찔 서로 엇갈려서도 한참은 숨까지 멈춘다. 서로가 감염우려의 불신 때문이니 비극이다. 아니 복면 쓴 강도들인 양 두려움 속에 등 돌린 차렷 자세의 모습들은 차라리 희극에 가깝다. 무서운 전염성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과 공포가 만만찮아서다.

이정표인 벤치에서도 다리를 못 쉰다. 오며가며 앉았을 무수한 나그네들 중 감염자가 없으란 보장이 없으니까. 또 평상시엔 병, 깡통 등 쓰레기들을 주워 파킹장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었다. 공짜인 산에 빚진 듯싶어 입장료대신 치부해서였다. 허나 이 난국엔 암만 눈에 거슬리고 밟혀도 외면한다. 혹여 균이 묻어 있을까봐. 이번 대란의 참화 여파로 탄생된 이색풍조 하나! 길 어디서나 나뒹구는 마스크나 비닐장갑들이다. 흉물스럽게 버려진 그 비품들이 아름다운 산에까지 쓰레기로 등재됐다.

쓰레기터처럼 산에 마구 버려진 실상들을 보면 참으로 갈 길이 멀다. 과거의 페스트나 스페인 독감의 대참사 때처럼 인류의 역사는 또 그렇게 되풀이 돼 흘러갈 것이다. 도돌이표처럼…

<방인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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