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홍익인간 정신과 흑인폭동

2020-06-03 (수)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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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모든 나라에는 건국신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한국도 한민족의 시조이자 고조선의 창업왕으로 알려진 단군에 관한 신화가 있다. 단군신화에는 환웅이 웅녀에게 쑥과 마늘을 주면서 동굴속에서 버티라는 명을 내린다. '곰 여자'인 웅녀는 신화에 나오는 환웅의 아내이자 단군의 어머니 이후 사람으로 변신한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웅녀는 100일간 동굴에서 버텨 사람이 된다. 신화에 따르면 웅녀는 곰에서 인간이 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곰족과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는 호랑이족이 경쟁하는 구도속에서 버티기로 승부한 곰족이 승리, 두 부족이 함께 통일 화합하여 연방정부가 이루어졌다는 해석이 있다.

여하튼 단군신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준다. 호랑이와의 투쟁에서 곰이 이긴 이유는 시간을 기다리며 참는 데에 있었던 게 아닐까, 즉, 영웅성보다는 덕성을 더 우선시 하는 우리 한민족 특유의 정서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홍익인간’도 단군이 조선을 건국할 때 내건 이념으로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자’는 뜻이다.


홍익인간 정신의 실천은 코로나19 대응에서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인커뮤니티가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타인을 위한 이타정신에서 단연 으뜸을 보였다. 땀 흘리고 수고하는 미국 병원이나 경찰서 등에 마스크와 세정제 등을 앞장서 전달하는 한인단체와 교회들, 이들의 정신은 어둠 속에 빛을 발한다. 코로나 감염 방지용 마스크나 일회용 장갑을 아무데나 버리는 행위와는 전면 배치된다.

미국은 무엇보다 더불어 사는 정신이 요구되는 나라다. 한인들끼리만 잘 살려고 한다면 타민족의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4.29 LA폭동 때 죄없는 한인사회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던 사실이 이를 잘 입증한다. 백인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피투성이가 된 흑인 로드니 킹 사건에 분노한 시위대는 평생 한인들이 땀흘려 일구어놓은 터전을 닥치는 대로 불태우고 부수고 약탈해갔다. 한인들이 자신의 나라에서 돈을 벌어 자기들만 좋은 집과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데 대한 평소 불만이 터진 것이다.

최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경찰의 흑인에 대한 강압적인 체포 과정에서 흑인이 숨지자 흑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최루탄, 투석전, 총격사건까지... 시위대는 경찰차와 건물, 상점 등에 방화 및 약탈 등을 마구 저지르며 극심한 공포감을 자아내고 있다. 마치 28년전 4.29 LA 폭동의 악몽이 연상돼 몸서리 쳐진다. 벌써부터 한인상점들이 이들에게 약탈당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시위는 워싱턴DC, LA, 뉴욕 등 140개 도시로 확산되면서 무법천지 상태가 되고 있다. 시위가 폭동으로 비화하자 40개 도시가 비상사태 선포 및 통행금지령을 발동하고 12개주와 워싱턴DC 등에 주방위군 투입 혹은 승인됐지만 시위는 더 격렬해지고 있다. 미국의 건국이념을 무색케 하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다. 코로나 스트레스까지 겹쳐 사태가 더 악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미 건국신화의 핵심에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는 의지로 나라를 세우고 예지와 헌신으로 그 업무를 달성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흑백갈등과 인종차별, 빈부의 격차 등만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인들이 앞장서 미국사회내 정신적 모럴 리더십의 모범을 보여주면 좋겠다.

홍익인간은 다른 말로 공익인간(公益人間)이 아닐까. 내 가족만 아니라 타인과 함께 공존 공생하는 위대한 정신이다. 우리가 이를 잘 실천하고 산다면 5억명이 함께 숨쉬는 미국에서 코리언이 문제의 원인으로 홀대받는 아시안이 아닌, 미국사회에 이로움을 주는 존경받는 민족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할 수 있지 않을까. 들불처럼 번져가는 시위는 홍익인간 정신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심각하게 떠올리게 한다.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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