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 하는 즐거움

2020-05-11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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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1세라고 하면 1970년도대의 이민을 가리킨다.
한국의 부동산 값이 폭등하여 근래 이민들은 한 자금 가지고 오지만 이민 1세대는 문자 그대로 빈손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그 때의 이민들은 한국에서 생계가 막연하여 그래도 잘 사는 나라에 가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만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언어도 부족하고 기술도 없어 그들 대부분은 노동에 종사하였다.

필자도 한국에선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신학교육이 어떤 직장에도 쓸모가 없고 미국교회를 맡기에는 영어가 딸려 결국 닥치는 대로 청소도 하고 잔디도 깎고 공장 노동에도 종사하고 보험회사의 말단 직원노릇도 해보았다. 나와 함께 노동하던 포토리칸이나 흑인들은 노래를 중얼거리고 상소리를 지껄이며 웃기도 하였지만 나는 비와 같이 땀을 쏟으며 허덕이는 상태이니 일하는 즐거움이나 노동의 신성성(神聖性) 따위는 따질 겨를이 없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성취도인데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면 일하는 즐거움을 알 수 없다. 성취감이 행복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뉴저지 주에서 평생을 지낸 발명가 토마스 에드슨은 “나에게 하루 여덟 시간 노동제나 보수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나의 보상은 오직 성취하는 기쁨에만 있었다.”고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였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 한 마디로 그것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집안 살림이든 직장생활이든 우리의 시간은 일로 메꾸어 지기 때문에 즐겁게 하루하루를 일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지겹게 일하고 억지로 일한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것이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즐겁게 땀을 흘릴 수 있는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며 땀을 흘릴 수 있는 노동의 가치를 느낄 수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행복해진다.

미국사회는 청교도(淸敎徒)의 근로정신이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펜실베니아 주를 개척한 영국의 퀘이커 교도 윌리엄 팬은 동료 이민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개척자 동료 여러분 즐겁게 땀을 흘립시다. 노동은 우리를 개척군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오.”
일(work)과 밥벌이(job)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 번 밖에 없는 나의 귀중한 생애가 밥벌이로 끝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육체노동에 종사하든 정신노동에 종사하든 일에 대한 가치와 보람이 밥벌이에 선행되어야 비로서 우리는 나의 생애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고 행복을 찾게 된다.

옛날 영화지만 맨하탄에서 건너다 보이는 호보큰을 배경으로 한 명화 ‘부두’가 있었다. 명배우 말론 브란도가 실직하여 일을 달라고 부두 노조에 애원한다.”나도 일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나도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작가는 노동을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거룩한 활동으로 부각하고 있다. “일은 곧 돈이다”고 하는 공식은 적절한 노동관이 아니다. 일은 자기의 모습을 찾는 것이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쉬고 노는 것이 행복 같아도 실직자에게 물어보아라. 일하는 것이 행복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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