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29 LA 폭동 28주년을 맞이하며…

2020-04-28 (화) 김동찬 / 시민참여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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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3일 지금은 작고한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이 과속으로 흰색 현대 엑셀을 몰고 가다 체포되어 고속도로에서 4명의 경찰들에게 무지막지하게 폭행 당했다. 그리고 장면을 누군가가 비디오로 촬영하여 NBC에 제공하여 뉴스로 방영이 되었다. 흑인 커뮤니티는 분노하였다.
이후 1992년 2월 5일 흑인 밀집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백인 밀집지역으로 옮겨서 배심원을 구성 하였고 4월 29일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사 결정을 내리면서 흑인들은 분노 했고 경찰의 과잉 진압에 불만이 싸여 있던 히스패닉 커뮤니티까지 합세 하면서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폭동으로 비화하였다.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경찰, 6,000명의 주방위군, 2,000명의 연방 육군 7보병사단, 40보병사단 헌병대와, 해병 1사단 1,500명, 경기갑 정찰 장갑차 부대, 82 공수부대 등 1만3,500명의 사단급 부대를 동원하여 먼저 부자들이 있는 베브리힐스를 방어 했다.
그러나 한인 상권이 밀집한 사우스 센트럴 지역은 무법천지로 두어 이 지역은 약탈과 방화로 이어졌다. 이 폭동으로 사망 55명, 부상 2,383명, 1만3,770명을 체포하면서 5월 4일 진압을 끝냈다. 그리고 1992년 6월 28일 데릴 게이츠 LA 시 경찰국장이 사임했고 연방민권법으로 해당 경찰 2명은 유죄 2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미국은 잊을만하면 폭동이 발생한다. 폭동의 기저에는 경제적인 문제이지만 폭동의 발단은 늘 인종차별적인 공권력과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28년전 92년 LA폭동은 이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던 한인들에게 엄청난 피해와 충격을 주었다.


미국에서 열심히 일해서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한인 커뮤니티는 미국의 살벌한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에서 교육받은 1.5세 2세대들이 커뮤니티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외침은 미국에서 성공하여 한국으로의 금의환향이 아니라 미국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는 한국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현실은 유색인종이고 소수계이고 이민자이기에 미국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다른 소수계와 연대를 해서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한인 2세대들은 한인 커뮤니티에 호소하였고 한인 커뮤니티는 정말 열심히 유권자 등록과 투표 참여활동을 하였고 특히 2세대들은 다른 커뮤니티와 연대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올해는 LA폭동 28주년이다. 우리는 미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과거를 늘 되돌아 보면서 거기서 교훈을 찾고 현실을 파악하고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해야 한다. 폭동의 발단은 흑인과 공권력의 충돌이었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던 한인커뮤니티가 모든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 썼고. 인종차별주의자로 매도 되었다. 왜! 왜 그랬을까? 우리는 28년전 폭동을 늘 기억해야 한다.

2020년 전세계는 유례없는 동시다발적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에 무참히 당하고 있다. 모두들 집에 갇혀 있고 경제는 올 스톱했다. 그리고 인종주의자들은 이 바이러스의 시작이 중국이라는 것을 가지고 중국인과 중국인 비슷한 아시아 출신자들에 대한 비난과 분풀이성 인종혐오 폭력을 가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그 후유증이 어떻게 나타날지 우리는 예측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인들이 코로나와 싸우고 있는 병원에 마스크를 지원하고 경찰서에 마스크와 손세정제를 지원하는 노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스스로도 힘들지만 어려운 타커뮤니티에 대한 협력, 경찰, 지방 정부 그리고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긴밀하게 해야 할 것이다.

<김동찬 / 시민참여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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