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과 한 상자

2020-02-22 (토) 김자원/ 뉴욕불교방송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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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초인종소리에 무관심한 편이다. 그 날은 몇 번이나 초인종이 울려서 마지못해 내려 갈 참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라는 첫 마디. 거의 10년이 가까워 오는 동안 소식이 끊겼던 여인.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간에 오랫만에 만난 반가움이 밀려왔다.

서로 얼싸안고 -잘 지냈는가- 안부를 묻는다. 잠깐 기다리라며 다시 나간 그녀가 사과 한박스를 들고 들어온다. 왜 이런 걸 무겁게 가지고 오느냐는 내 핀잔엔 아랑곳 하지않고 그동안의 얘기를 쏟아낸다. 아이와 어머님을 모시며 살아왔던 그녀는 가게를 운영하며 그런대로 지내던 중. 그녀 집 2층에 세들어 살던 분의 횡포로 힘들었단다.

가게를 하며 그것을 방어해 가는 동안 시달리는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장사마저 어려워졌다. 몇 년을 힘들게 버티다 집 모기지를 못내 은행에 넘어가고 가게 문을 닫으며 친구가 있는 타주로 이사를 했다.


아들은 성장하여 경찰학교를 졸업하였고 현재는 군에 가있다. 얼마 전에 다시 뉴욕으로 이사와 안정을 찾았다. 현재 자신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좋은 소식. 거기까지 얘기를 하다 그동안 한번도 자원씨를 잊어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한다.
눈물을 보이는 그녀의 진정성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어려울 때 힘이 되었는데 아무런 얘기도 못하고 떠난 것 때문이다.

“다 지난 일이다”며 “괜찮다”고 얘기하는 내 볼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난감했을 어렵고 힘들었던 절망의 시간을 잘 견뎌낸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았다. 몸도 마음도 아팠던 지난 세월 우울했던 표정은 사라지고 편안하고 오히려 더 젊어 보였다. “예뻐지고 건강해 보여서 좋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몇 년 전 그녀가 주고 간 수표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대로 버렸었다. 아무 생각없이 그냥 버릴 수 없었던 것은 사람에 대한 실망의 느낌이 남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완전히 잊고 지냈다.

그녀가 놓고 간 현관에 놓여진 사과 박스를 난 열지 못했다. 오가며 바라보면서 스스로 참회의 시간을 갖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렇게 지나치기를 일주일여 하는 동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을때 사과 상자를 열었다. 붉고 발그스레한 싱싱한 사과가 나에게 살가운 웃음을 보내주고 있었다. 그녀를 만났을 때의 뭉클함이 가슴에 차오르면서 코끝이 시큰해 온다.

<김자원/ 뉴욕불교방송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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