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봉감독과 냉장고

2020-02-18 (화) 나 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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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체스터 칼럼

지난주 아카데미 시상식에 '기생충'이 호명될 때 여러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2002년 필라델피아에서 일하던 어느 날 병실에 있던 미국 할머니가 날 불렀다. “Rina, do you know the refrigerator? Do you have any?” 할머니가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집에 냉장고가 이젠 필요 없어서, 냉장고 아니? 있으면 굉장히 편하거든. 가져가 써볼래?”

아주 옛날, 나 어릴 적에는 흑백티브이가 있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불주사를 맞고 대변 봉투로 기생충 검사를 받고 집에 있는 포니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포니는 그랜저가 됐고, 한국에선 기생충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 냉장고 외에 김치냉장고까지 집마다 2대의 냉장고가 있던 그 시절에 나에게 냉장고를 아는지 물어보는 환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알고 보니 미국 옛 드라마 'M*A*S*H'와 6.25가 할머니가 아는 한국 전부였다.

내가 대학을 들어갈 땐 이미 쌍꺼풀과 라식 수술에선 한국이 세계 1등을 하던 시기인데 미국 사람들은 한국에 큰 병원이 있는지 수술도 하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다가 '겨울연가'라는 드라마로 일본에서 시작된 한류가 필리핀에 상륙했다. 가수 '비'와 '송혜교'의 '풀하우스'가 필리핀에서 인기를 얻으며 갑자기 필리핀 간호사들이 한국을 인정하고 부러워하며 우리는 친해졌다.

필리핀 간호사들과 친해져서 좀 편안해진 필라 병원을 떠나 뉴욕으로 왔다. 다행히 뉴욕 병원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한국이 좋아서 한글을 배운다는 필리핀 간호사, 부모님이 '대장금' 팬이라서 곧 한국으로 여행을 갈 거라는 일본 간호사를 만나 호감으로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비아시안계 환자, 동료들에게 한국은 존재가 없었다. 그러나 내 피부가 도자기 같다고 칭찬할 때 얼른 한국 화장품 '마몽드'를 선전하고 사람들의 손에서 '삼성'핸드폰을 발견하면 삼성이 한국 기업임을 알렸다. 피겨 여제 '김연아', 간이식 세계 1위 등 뛰어나고 잘난 한국을 틈나면 외쳤다.

그런데도 한국의 존재감이 미미할 때 갑자기 싸이가 '강남스타일' 한방에 한국과 강남을 알렸다. 백인 친구들이 '강남스타일'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고 미국의 삶이 호감 속에서 편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번엔 BTS가 등장했다. 심지어 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라서 BTS 노래를 이해할 수 있으니 참 좋겠다.'라며 내 한국어를 부러워했다. 

냉장고의 충격은 진작 지워졌지만, 그래도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전율이라는 걸 느꼈다. 18년 전 미국에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흔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한류'라는 물결이 잔잔하게 내 삶에 들어와 미국 생활에 활력과 지지가 되더니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으로 그 물결이 쓰나미가 되어 내 18년 미국 생활에서 받은 차별과 힘듦을 완전히 덮어 주고, 미국 땅에 럭셔리 한국을 각인시킨 것 같다.

나의 '냉장고' 이야기가 이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돼버려 진심으로 기쁘다.

<나 리/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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