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암흑 속에서

2020-02-17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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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소녀 작가가 나치 통치 시절 다락에 숨어 살던 체험을 쓴 ‘안네의 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드디어 숨어있던 은신처가 발각되어 게슈타포가 문을 부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왔을 때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조용히 가족들에게 말한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공포 속에 살아왔으나 지금부터는 희망을 품고 살게 되는 거야.” 여기에서 게슈타포는 인간이 겪는 고통을 상징한다. 고통을 앞에 놓고 기다릴 때는 두려움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게슈타포의 손에 들어가면서부터 좋은 미래를 향한 해방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희망은 고통 속에서 움튼다. 에델바이스는 봄이 되기 전에 차가운 눈 속에서 이미 꽃을 피우는 것이다. 바다의 조수는 아마도 지구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이다. 들어오고 또 나간다. 조수가 물러간 자국은 지저분하다. 그러나 한 때의 자국만으로 낙심할 것은 없다. 조수는 다시 밀려와 만조가 될 것이며 아름다운 물결이 어느 날의 수심을 잊게 해 줄 것이다. 감정이 조수에 끌려 다니는 것보다 조수의 변화를 조용히 기다리며 희망 속에 오늘을 착실하게 메우는 것이 지혜롭다.

프린스턴 대학 교수 조지 헨드리 박사는 날로 늘어가는 청년 자살에 대하여 젊은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청년이여 저항을 감수하라!” 자살이 살 의지를 상실하는 것이라면 살 의지란 저항이 주는 자극에서 오기 때문이다. 저항은 피할 것이 아니라 감수해야 한다. 저항이 자극을, 자극이 소망을, 소망이 행복을 낳는다. 뜻밖에도 순탄하게 보이는 부부 사이에 문제가 곪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랑의 깊이는 많은 저항을 뚫고 다듬어진다.
네트 없이 테니스를 치면 저항은 없지만 재미가 없을 것이다. 케이블카를 타는 것보다 비탈길이 있기에 등산의 의미가 있다. 쉽게 살겠다는 말은 불행하게 살겠다는 말과 큰 차이가 없다. 인생이란 나그네 길에 꼭 필요한 두 가지 장비는 희망의 지팡이와 인내의 신발이다.


폭풍이 올 때 닭은 자신의 날개 속에 얼굴을 파묻지만 독수리는 날개를 펴고 그 바람을 타서 안전한 곳으로 날아간다. 흔히 사람들은 고통의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지만 사실은 고통과의 용감한 투쟁 속에 해결에 이르는 방법이 있다. “아플 때는 잘 알아야 한다.”는 말처럼 고통을 지긋이 씹어보는 인내의 맛을 터득할 때 비로소 고통이 극복된다. 요즘 사람들은 기다리는 맛을 모르는데 괴로울 때면 기다리는 예술을 배워야 한다. 기차가 터널에 들어갔을 때 어둡다고 기차에서 내리지는 않는다. 조용히 앉아있으면 밝은 세계가 다시 오게 마련이다.

기다림이란 여유 있는 마음이다. 한 가지에 붙들려 속상해 하지 말고 다른 길도 있다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성경에 이런 멋진 말이 나온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뉴욕 웨스트사이드 교회 목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종교잡지에 실었다. 한 형제가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인상에 남는 것은 아버지의 술 마시는 모습이었다. 두 아들 중 하나는 아버지처럼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동생은 절대 금주를 주장하다가 결국 목사가 되었다. 이 형제는 청년 시절 심리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었는데 “당신이 알코올 중독자가 된 원인이 무엇인가?” “당신이 철저한 금주주의자가 된 원인이 무엇인가?”하는 각각 서로 다른 질문을 받았으나 형제의 대답은 똑 같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한 아들은 아버지의 사는 모습을 뒤따랐^으며, 다른 한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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