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메리칸 드림과 동포들의 과잉경쟁

2020-02-04 (화) 전상복/연변 과기대 겸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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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들이 미국의 꿈을 갖고 이민 온다. 1965년 개정이민법으로 인해 미국 이민의 문이 활짝 열렸다. 본인이 유학차 55년 전 도미 후 미시간 주에서 2년 유학 후 뉴욕에 정착했다.

1966년 당시에는 약 3,500명의 한인들이 뉴욕에 거주했다. 교회도 맨하탄과 브루클린에 한곳씩 개척되었다. 1970년대 들어 대거 한인들이 미주에 이민 왔다. 유학생, 지사원, 외교관들 소수인들이 뉴욕 일대에서 한국의 가발과 잡화 수출로 브로드웨이에서 상권을 개척해 상당한 기반을 잡았다.

그 후 수산업, 청과상, 세탁소, 도매상, 수퍼마켓, 식당, 선물센터, 네일샵, 약국, 부동산 등 이민 1세와 지상사로 온 한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비즈니스를 확장해 왔다. 한국인 도매와 소매 및 수입상 운영은 세계인이 애용하는 각종 사업과 수출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주에 약 250만 한인과 4,500개의 교회가 있다. 뉴욕을 중심으로 한인과 유대인, 중국인들이 주로 하는 업종을 비교해 본다.

유대인은 역사에 일찌감치 정착할 곳을 찾아다녔지만 1945년까지 방랑인 신세였다. 어느 곳이든 쉽게 이주할 목적으로 그들의 주 업종은 보석상이었다. 중국인은 식당으로 개척했으며 뉴욕에 지하철 설치의 노동자로 이민 와 정착 했다.

유대인은 동족간에 동일한 업종을 같은 장소에서 절대 피한다. 중국인은 동업에 타고난 민족이다. 한인들은 새로운 업종을 개척하기 보다는 동족이 하는 업종이 잘된다 하면 너도 나도 무작정 그 업종에 뛰어들고 있다.

예컨대 교회도 가까운 지역에 4~5곳에 설립해 무한경쟁을 한다. 뉴욕일대 약 700여 교회가 있다. 이민 1세들의 과잉경쟁은 많은 한인들의 사업 실패를 가져왔다. 자녀들의 비싼 학비와 건강 보험 및 주택비 부담과 인상으로 여생을 힘들 게 만든 것이다.

L.A.지역에는 많은 한인들이 각종 업종을 개척해 성공도 했지만 많은 실패자들이 뉴욕 플러싱으로 오기도 했다. 이들은 남은 얼마의 자본으로 곧바로 한인들이 많이 하는 업종을 시작해 곧바로 문을 닫는다. 다시 뉴저지 팰팍으로 와서는 역시 유사업종으로 인수 혹은 개척하지만 6개월을 못넘기고 렌트와 각종 빌 미지불로 문을 닫는다.

브로도애비뉴에서만 50여 곳의 한식, 중국식당 등이 무한경쟁으로 쉽게 폐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약국, 커피샵, 반찬집, 은행, 한인상대 각종 업종이 수요보다 공급이 지나치게 많다. 이렇게 몇십 만 혹은 몇백 만 달러를 쉽게 날리니 남의 일이 아니다.

네일샵도 신장개업이다 덤핑 세일이다 하여 혼자 성공을 욕심 내다가 본인은 물론 이웃가게까지 모두 망하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이나 중국인들은 동업을 잘 하며 공동구매로 건물 구입을 한다.

한인들도 동족끼리 과잉 경쟁하지 말고 양보와 합심으로 동업을 해야 한다. 또 함께 힘을 합해 건물을 사는 것이 장기적으로 한인경제가 사는 길이다. 이렇게 해야 아메리칸 드림이 가능하니 처칠의 ‘절대 포기하지 말라(Never Give up)’는 말을 명심해야한다.

<전상복/연변 과기대 겸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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