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칼럼] 이리를 만난 양의 선택
2019-12-19 (목)
박상근 목사 / 새크라멘토한인장로교회 담임
교회에 관한 오래 된 거짓 신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거짓의 함정이기도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또 다른 방향에서 같은 함정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거짓 신화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도덕적이며 더 착하며 더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편견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잘못을 범해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냐!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그렇게 밖에 행동하지 못하냐!”라고 비웃음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마디로 명백한 미신입니다.
저는 아직 인생을 오래 살아보지 못했지만 60년 넘는 삶을 살아오면서 내가 만난 최고의 악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다 만나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교만한 인간도 교회 안에서 만났습니다. 뉴스에 등장하는 가장 잔인하고 치사한 사람들도 교회 안에서 다 만나 보았습니다. 물론 저의 인생의 경험이 한계가 있고 교회 생활이 사회생활보다 더 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세월이 가면서 더욱 강하게 하게 됩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람들, 윤리적으로 훈련이 잘 된 인격자들을 골라서 제자를 만든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서 회개시키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이란 뜻인 교회는 애초에 죄인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죄인들이 모인 공동체에 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럴듯하게 포장을 하고 덧칠을 해도 그것을 어찌 감출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오랜 시간 동안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이유도 근거도 없는 도덕적, 윤리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살아온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목회자라면 교회 안에서 반드시 장로란 이름의 권사, 집사, 성도란 이름의 이리떼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할 때 이리 떼 속으로 양을 보낸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리 떼를 만난 목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척 안타깝지만 대개의 경우 양으로 파송 받은 목사는 이리 떼 같은 성도들을 만나면 같이 싸우다가 결국은 본인이 이리가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물론 모든 교인들이 이리 떼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수 백, 수천의 양들 중에 한 마리의 이리만 있어도 목회는 힘든 것입니다. 그 때 목사들은 그 이리와 싸우느라 자신이 파괴되고 부서지고 있음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파괴되어 가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그러면 나머지 절대다수의 순전한 양떼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교회에서 환멸을 느끼며 떠나갑니다. 특히 아직 선악에 대한 제대로 된 기준도 갖지 못한 어린 아이들은 더욱 크게 상처를 입고 신앙 자체를 버리게 되기도 합니다.
이리를 만난 양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예수님이 분명이 주셨습니다.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지 마십시오. 그 이리를 대하는 목사의 자세는 첫 째 자기를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 부정은 기분 나쁜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 야비하고 비참한 인격의 이리를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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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근 목사 / 새크라멘토한인장로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