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난데일 소녀상 잔상(殘像)
2019-11-26 (화) 07:50:18
우병은 / 스털링, VA
얼마전 구름이 낀 잿빛 낮에 워싱턴 한인사회의 서울인 애난데일에 개인사가 있어 들렀다가 최근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엘 혼자 갔다.
먼저 찻길에 차를 세우고 유리창을 내리고 폰 카로 사진을 찍고 내려서 앞에 가까이 가보았다. 의자에 앉아 어깨동무하면서 셀카로 찍고 오래 앉아 얼굴을 자세히 보니 15살쯤 앳되고 동그랗게 생긴 얼굴이었다. 먼 산만 바라보는 눈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무지막지한 일본군에게 당했을 생각에 가슴 밑에서 시나브로 슬픔이 올라와 눈물이 났다. 이래서 오래 보아야 알수 있고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정치가 박순천씨, 배우 복혜숙씨 글을 읽어 보면 당시 여자들은 18세 넘어서 사춘기가 왔다고 한다. 사춘기를 맞은 처녀라면 성지식이라도 있어 일본군 앞에서 저항도 하고 발버둥도 치고 울기라도 했을 텐데 아직도 어린 소녀가 무지막지한 일본군 앞에서 된서리 맞아 속절없이 스러진 꽃처럼 당했을 거라 생각하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갖다 바친 매국노나 나라 통치를 제대로 못한 국왕에 대한 원망이 일었다.
촌사람이 ‘서울’에 온 길에 최근에 신문에 난 한인 커뮤니티 센터 구입 예정지로 찾아 가면서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꽃봉오리 소녀가 잊히지 않아 눈물이 계속 났다. 신문에 난 건물이 ‘종로’ 대로변에 있고 애난데일 중심지에서 멀지 않아 1백 불짜리 열개 밖에 헌금 못한 나 이지만 썩 맘이 들었다.
아직도 곡식 심는 밭에 나무 심으면 천벌 받을 거라는 시대에 부모님은 복숭아나무를 심어 돈을 말로 긁어 모으시고 논을 많이 사셨다. 시골의 한 면에서 여자는 두어 명 정도만 여학교에 보내던 때에 우리 누님도 여학교 다녔다면 농사가 엄청 많은 집이었다.
워낙 자수성가 하셨던 부모님은 계속 손발을 움직이면서 농사 지어 나온 쌀을 탈탈 털어 공출 당하셨다. 게다가 홍역을 앓고 영양 부족으로 평생 귀머거리로 살아온 나이니 일본에 왜 할 말이 없겠나? 정신대만큼 나도 할 말이 많지만 그런 과거를 들추다간 나에겐 발전이 없다고 수요집회니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난데일 평화의 소녀상을 보고 그들의 처절함이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배상금은 안 받아도 좋으니 가슴에서 울어 나는 사과라도 해달라고 일본에 간구해 본다.
<우병은 / 스털링,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