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참으로 길고도 긴 이별’

2019-11-20 (수)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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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한때 명성을 날리던 영화배우 윤정희씨가 최근 앓아오던 알츠하이머, 일명 노인성 치매 증세가 딸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악화됐다고 한다. 윤정희씨는 그동안 은막에서 은퇴한 후 피아노의 거장 백건우씨와 결혼해 오붓하게 살면서 공연마다 함께 다니는 모습을 보여준 아름다운 잉꼬부부였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는 심해진 병세로 인해 공연에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슴 찡한 기사는 한번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앞으로 그녀의 의식과 기억력이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를 옆에서 지켜보고 간병하는 가족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치매란 환자로부터 기억력을 서서히 빼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병이다. 이 병은 돈과 권력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두렵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이 병을 앓다 죽었다. 치매는 간병하는 가족들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한 질환이다. 레이건의 부인 낸시 여사도 치매를 ‘참으로 길고도 긴 이별’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가족들은 힘들다 못해 ‘신은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나’ 하고 원망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한번쯤은 그 치매 환자가 평생동안 말 못할 고통을 삼키며 초인적인 힘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인사회도 이 치매에 걸린 환자를 돌보느라 고통받는 가족 구성원이 꽤 있는 것으로 안다. 환자에 대한 원망보다는 이들이 그동안 겪은 고초를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이들은 이민 와서 온갖 고난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해 가족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흘린 땀과 눈물, 노고와 희생이 아니고서는 오늘의 번영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치매 환자들의 아픔과 고통은 한마디로 ‘영광의 상처’라고 하고 싶다. 이들의 상처란 고무줄 당기듯 인간의 한계를 무한대로 뛰어넘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진 상태이다.
한인사회도 이제는 잠시 멈춰 서서 이 단어를 곰곰 생각하며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1세들이 죽어라 고생하다 마지막에 치매로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면 오로지 가정의 부만을 생각해서 견뎌내기 어려운 초인적인 힘으로 자신을 너무 혹사하며 희생하고 사는 것만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도 이민 와서 열심히 일해 이제 와서 살만한 가정들 중에 현재 치매에 걸려 본인은 물론 가족들이 고초를 겪는 집들을 볼 수 있다. 지인중에도 30년 이상 죽도록 고생해서 일군 재산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부를 축적하고도 뒤늦게 부인이 치매에 걸려 남편이 부인을 간병하느라 꼼짝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죽어라 모은 돈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치매환자들을 돌보느라 힘에 부쳐 고통받고 있는 가족들은 환자의 상태를 영광의 상처로 이해하면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그들이 환자가 평생 흘린 땀과 노고 덕분으로 오늘날 그처럼 안정되게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환자들이 겪는 고통은 현재 자신을 간병하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 그동안 남몰래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말해주는 징표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우리 모두 자기 내면의 윤택함도 좀 생각하며 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치매에 걸리는 것은 물론 인간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유전일 수도 있고 정신건강 관리를 잘 못해서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건 치매는 무서운 병이다. 걸리지 않도록 죽도록 일만 하지 말고 자신이 평상시 먹고 싶고, 보고 싶고,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면 잠시라도 일탈해보자.

쉽게는 산이나 바다, 아니면 가까운 공원에라도 찾아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하면서 몸과 마음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푸는 것일 것이다. 그래야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치매가 우리를 덮치기 전에 삶의 여유를 찾는다면 그 어두운 그림자가 쉽게 우리를 공격하진 못할 것이다.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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