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혜있는 사람

2019-10-28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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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슬기이다. 지혜는 이해력에 근거한 건전한 판단력을 가리킨다. 지식은 학습으로 얻어지지만 지혜는 경함과 수양으로 두터워진다. 흔히 인격자라고 하면 지혜롭고 인품이 너그러운 사람을 가리킨다. 위선자나 엉큼한 인간을 ‘나쁜 지혜에 밝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어디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확실치 않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생항로에서 부딪치는 어려움들을 헤쳐 나가는 힘, 새 것을 발견하고 만들어 나가는 힘, 생활을 보다 낫게 개선해 나가는 힘이 지혜이다. 한국어에 ‘꾀’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꾀’ 역시 일을 잘 꾸며내는 묘한 생각을 가리키지만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다. “꾀가 많다”고 하면 잔재주가 많으나 인품이 너그럽다는 이미지는 없다. 참 지혜는 남을 돕고 남을 섬기고 남을 살리는 지혜이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보자고 결심하지만 그것이 잘 안 된다. 첫 아이는 너무 엄격하게 키워 기가 죽게 만들고, 둘째는 좀 방임하였더니 탈선하여 부모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나가 버린다. 회사에 들어가 평사원이었을 때는 열심히 뛰는 모범사원이었으나, 계장 과장으로 올라가며 부하 다루기에 서툴러 실패하기도 한다. 남을 살리는 충분한 지혜가 부족한 것이다.


자혜의 임금이란 별명이 붙은 솔로몬도 “하나님, 지혜를 주십시오.”(잠언 2:6)하고 간구하였다. 좋은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옅은 지혜보다 하늘에서 내리는 큰 지혜가 필요하다는 기도이다. 예수는 사랑을 강조하며 사랑이 곧 참 지혜임을 가르쳤다. 한국 뉴스의 단골 메뉴는 교통사고 소식이다. 날마다 다치고 죽고 부셔지고 한다. 너무 계속되니까 방송 시청자는 신물이 날 지경인데 사고 뉴스는 그칠 줄을 모른다.

세상에는 무서운 일, 돌발 사고들이 많다. 그러나 욕망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달려가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아직 너무 어려 인생의 큰 그림을 못 보고 있을 경우도 허다하다. 묻고 상담하고 어른 사회와도 교통하는 것이 지혜를 얻는 좋은 방법이다.

미국 교인들은 예배 후 목사와 인사할 때 “I enjoyed your preach ing."하고 인사한다. 직역하면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즐겼습니다.“라는 뜻이다. 한국교인들은 ‘설교를 즐긴다.” 혹은 “예배를 즐긴다.“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설교와 아름다운 성가대의 합창을 즐길줄 아는 것은 좋은 신자가 되는 지름길이고, 영적 성장의 밑거름이니 예배를 즐기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지루한 설교, 지루한 예배보다 설교나 예배를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 상문 곁과 문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부른다.”(잠언 8:1-2) 우리 일상의 모든 구석에서 지혜가 우리를 늘 부르고 있다는 말씀이다. 단지 우리는 물질과 명예 좇기에 눈이 어두워 지혜의 속삭임을 못 들을 뿐이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지혜의 음성을 경청하는 시간이 기도이며 명상이다.

우리를 지혜에서 멀리 떠나게 하는 것이 ‘잘 난 척하는 마음’과 교만이다. 겸손과 나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토양이다. 사랑이 참 지혜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낸다. 둘째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알기 때문에 사명감에 불타고 보람있는 생활을 한다. 셋째 사랑하는 사람은 나쁜 생각이나 비관에서 벗어나 선의와 낙관(樂觀)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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