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 가을이다

2019-09-30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크게 작게
금년 가을은 공식적으로 9월 22일에 시작되었다. 바람이 선선해지고 성급한 나뭇잎들은 어느 새 초록 옷을 벗기 시작하였다. 나는 가을을 좋아한다. 활짝 피어 단풍이 되었다가 땅에 묻혀 미래를 준비하는 나무들의 그 숭고한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세월을 용감하게 맞이하고 삶을 진지하게 마무리하는 가을이 나는 너무나 좋다.

가을의 기쁨은 수확의 기쁨이기도 하다.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땀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계절은 흐뭇하고 마음의 풍요를 느끼게 한다. 어디 자연 뿐이겠는가? 인생에도 수확이 있다. 기쁨을 거두기도 하고 후회를 타작하기도 한다. 영광을 수확하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플루타크(Plutarch)영웅전'은 단순히 로마 그리스 시대의 영웅 열전이 아니라 영웅의 진화를 말해준다. 고대 영웅은 신에 가깝거나 야수와 인간이 합쳐진 반인(半人) 반수(半獸)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영웅의 이미지는 보통사람(Ordinary people)에 가까워지는 것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미국의 영웅들은 Volunteers(무보수 봉사자들)이란 말을 흔히 듣는다. 널리 나와 내 활동이 알려지지는 않아도 한 구석에 묻혀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 영웅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인생의 진짜 수확을 하고 있다.


희생 없이 진리가 전달되기는 어렵다. 죽어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모든 초목의 대 법칙이다. 그와 같이 자기를 내놓는다는 것은 모든 역사 발전의 대 원칙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취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버려서 얻는 열매이다. 사랑이란 희생의 진가를 알 때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인간관계이다.

아름다운 단풍이 들과 산을 수놓고 있다. 나는 단풍 속에서 숭고한 순교자의 모습을 본다. 여름 내내 무성한 초록색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던 잎사귀들이 마지막으로 한 번 화끈하게 자신을 불태우고 떨어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낙엽의 사명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어 죽어서도 봉사한다.

나는 어려서 연필을 깎을 때 측은한 마음을 품어본 일이 있다. 요즘은 기계로 두루루 돌려버리니까 생각할 겨를도 없지만 옛날에는 칼로 연필을 깎았다. 연필대가 연약한 심을 보호하고 있다가 자기의 몸이 야금야금 깎여 내려가며 사명을 다하는 모습이 얼마나 갸륵한가! 몽당연필은 희생과 아픔을 통과해 온 개선장군과 같았다.

인도의 암 연구 권위자인 브래갠저 박사는 코브라의 독 속에서 항암물질을 발견하였다. 대만대학 의학부의 탄 교수도 식물독소에서 항암물질을 발견하였다. 독 속에는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살리는 힘도 들어있다. 대자연 속에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은 인간의 머리로는 몇 억분의 일도 발견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성경은 단언한다. 그 이상 더 좋은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탐구하는 것은 결국 세 가지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과 대자연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 셋은 모두가 하나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 혹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해를 주실 뿐이 아니라 그 해가 질 때 웅장하게 불타는 석양 노을도 주셨다. 옥수수를 주실 뿐이 아니라 그 윤기 있는 황금 색깔을 감상하게 하셨다. 수십 수백 종류의 과일과 열매들을 주실 뿐이 아니라 제각기 특색 있는 향기와 맛까지 주셨다.

나는 수확의 계절 가을을 맞아 또 한 번 감회에 젖어본다. 나를 믿어주는 이 있으니 더 진실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이 있으니 더 겸손하고, 나의 짧은 인생에 떫음을 남기지 말고, 남은 여음(餘音)이 향기롭게 하소서 하고 빌 뿐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