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삭발’과 재미한인

2019-09-20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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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계에 ‘삭발’ 바람이 일고 있다. 무소속 이언주 여성의원이 시작한 삭발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에 이어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 줄줄이 릴레이 삭발을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쌓인 울분이야 짐작가지 않는바 아니나 굳이 장관 한 명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항으로 제 1 야당 의원들이 투쟁방법으로 왜 삭발을 택했는 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지 잘 모르겠다.

정치적 투쟁으로 삭발하는 이들을 보는 불교계의 마음은 어떨까. 삭발은 불교에서 중요한 의식이다. 출가자들은 일정기간 행자를 거쳐 삭발을 하면서 세속의 인연을 끊어낸다. 머리카락은 번뇌와 망상을 상징하므로 인간사 잡념도 함께 끊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현실에 발 붙히고 결사적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이 무엇을 위해 삭발을 하고 있는 것인가.


대학시절에는 법대생이 고시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굳은 결심과 각오를 다지면서 삭발을 하고 실연당한 학생이 절로 들어가면서 삭발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전위 예술가들이 삭발 머리로 퍼포먼스를 하거나 춤을 추기도 했고 90년대 들어서는 노동자 파업 주동자 등 약자들이 기득권층에게 호소하는 충격적 투쟁법으로 삭발을 택했다.
이번의 삭발 투쟁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삭발을 해야 했거나 삭발하고 싶어도 못하는 마음들을 상상해봤다.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이들, 뇌수술이나 머리에 문제가 있어 삭발을 해야 했고 독한 약물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려 본의아니게 삭발 머리가 되어버린 환자들이 있다. 이들에게 윤기 자르르 흐르는 단발머리나 바람에 하르르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젖히는 손길이 얼마나 부러운 지 생각해 보았는가. 가진 것 많고 힘 있는 자들이 꼭 이 방법을 택해야만 했을까.
또 나이가 들수록 머리가 빠지고 없어지면서 마음 같아서는 삭발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 하지만 삭발한 사람을 보는 시선은 인종차별주의자, 으스스한 헤드 스킨족 등등 온갖 말과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한일외교관계 악화 속의 재일교포들을 생각해보자.
평생 차별과 멸시 속에 살아온 재일교포들은 요즘 같은 때 일본 곳곳에서 열리는 혐한 시위가 두려울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는 재일교포 변호사를 상대로 악의적인 형사고소나 징계 청구 등 인종차별적 공세도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전문직도 이런 상태니 재일교포들은 앞으로 더욱 신분을 감추고 살려 할 것이다.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남의 일 같지 않다. 한국과 미국의 사이가 삐끗거리면 재미한인들은 불안하다. 1942년 일본의 진주만공격이후 미국 서부지역의 일본인들은 어떤 일을 당했던가. 그해 5월3일 캘리포니아 일본 커뮤니티에 표고문이 붙었다.

‘5월9일 정오까지 모든 일본계는 정부가 지정한 장소로 모일 것. 소지품은 1인당 트렁크 2개만 가능. 나이프, 포크, 숟가락, 접시, 컵, 밥그릇 냄비 지참. 서부 방위사령관 존 드윗’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으로 눈덮힌 록키산맥 가운데 서부지역 일본인들을 강제수용했다. 시민권자도 2세, 3세도 물론 포함됐다.

재미한인들은 미국에 살아도 예나 지금이나 모국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1919년경부터 해방 때까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동부지역 유학생 등 모두 한두푼을 모아 독립성금으로 보냈다. 지난 수십년간 수해재난기금을 비롯 1997년 IMF외환위기시 달러 보내기 운동, 모국상품 구매운동으로 힘을 보탰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같은 말을 반복해 오고 있다. 재외동포청 설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법안 발의했다, 곧 설치될 것이다… 하지만 늘 공수표다. 750만 재외한인 관련정책 수립 및 시행을 일원화하는 재외동포청 설립은 요원하다.

최근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본국을 바라보는 재미한인들의 마음은 심란하다, 친정이 편안해야 이민 와 사는 우리의 마음도 편하다. 우리는 굳건한 한미동맹 아래 미국에서 잘 살고 싶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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