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유럽의 유명한 속담이다. 누구나 내세우기로는 ‘선한 의지’로 어떤 일을 시작한다. 그가 비록 빵 하나를 도둑질 했더라도 그렇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럴듯하다. 더욱 대표적인 것이 ‘구원팔이’ 사이비 종교들이다. 밖에 내어걸기는 천국이 열릴 것처럼 요란스럽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폭격하는 것도 ‘선의’로 해석하는 쪽도 있다.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을 잡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행적도 선의로 믿는 자들이 아직도 있다. 자기 일방주의자들이다.
광풍이 지나갔다. 조국 법무부장관을 임명하는데 말도 많았고, 글도 많았다. 뉴스는 더 많았다. 비슷한 경우에 비춰봤을 때 거의 전무후무하다. ‘1개 국무위원 인사검증’이라고 하기에는 터무니가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거의 한 달간 112만 건이라는 뉴스기사가 나왔다는 것은 하루에 평균 4만 건씩이다. 언론이 그렇게나 많은 지도 의문이고, 무엇을 위해 그렇게 매달렸는지 정리해보고 할 가치조차 별로 없어 보인다. 그들만의 ‘정의’를 ‘선의‘로 포장한 대표적인 일이다. 임명하지 말라는 ‘항쟁’이고 ‘전쟁’이었다. 그 보도의 97.8%가 “의혹보도”라는 분석이 나왔다. 사실보도가 2.2%다.(민주언론 시민연합) 그런데 임명해 버렸다.
1519년 사약을 받은 조광조(趙光祖), 조광조도 학문과 덕이 높아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주변의 시기가 심했으나 꿋꿋했다. 연산군을 처단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도 그를 깊이 신임했다. 정암(靜菴)은 폭군 연산군에게 간신 짓을 했던 이들이 눈치 빠르게 변신하는 걸 과감하게 골라낸다.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이다. 그러자 그 시절의 적폐들은 소위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을 기획한다. 궁녀들을 시켜 밤중에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새겨 벌레들이 갉아먹게 해서 주초(走肖), 즉 조(趙)씨가 역모를 꾸며 왕위찬탈을 한다는 음모를 꾸민다. 유생들과 백성들이 조광조의 무죄를 백방으로 호소하였으나 조광조는 화순 능주에 유배되고, 요즈음처럼 반개혁 세력들이 상소를 해서 끝내 처형당한다. 그 때로부터 딱 500년이 흐른 2019년, 가족까지 인질 잡힌 채 조국(曺國) 법무장관 후보자는 한 달 내내 날선 칼날 위에 서야 했다. 이렇게나 데자뷰(DEJA VU)를 이루는 역사의 아이러니도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런 흑역사의 반복은 이제는 끝낼 때이다.
이런 일들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무수하다. 기원전 2세기에 로마 공화정시대의 그라쿠스 형제(Gracchus)도 그랬다. 그들도 사후에야 로마의 ‘고결한 양심’으로 상징되지만 당시의 개혁에는 실패했다. 두 형제도 최고의 출신배경을 가졌고, 호민관이 되어 빈민과 평민들이 더불어 잘살고, 나라도 부강하게 하려는 선지자적 혜안으로 자작농을 육성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보수귀족의 반대와 저항으로 끝내 죽임을 당해 강물에 던져져 무덤조차 없다.
주어진 조건대로 살았다면 얼마든지 개인적으로 안락하고 평탄한 여생이 주어졌을 텐데도 그렇게 집단적으로 ‘강요된 침묵’을 거부했던 혁명가들의 노력들에 의해서 인류는 조금씩이나마 희망을 꿈꾸어 왔지만 이제 보니 아직도 멀었다.
역사에는 수많은 왕조와 왕들이 있지만 사후에는 특별할 것도 없는 장삼이사요 필부필부요, 초동급부(樵童汲婦)다. 그런데 그라쿠스 형제와 조광조의 이름은 남아서 이글에서도 다시 살아난다. 멀리는 이순신, 가까이는 안중근, 김구, 김대중, 노무현, 노회찬 등 역사적 혁명가들을 길러내는데 개인적, 국가적 비용은 환산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하다. 이는 돈과 노력만으로도 안 된다. 오직 역사만이 기억하는 일이다.
한발 뒤로 물러서거나 조용히 침묵하거나 그들과 동락하지 않는데 따른 린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대부분 굴복하고, 좌절해야만 했다. 그리고 악순환만 반복된다.
장관하나 바꾸면 신세계라도 열릴 듯이 저렇듯 집요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지 의심의 여지도 없는 듯하다.
뒤집어보면 간단하다. 썩을 대로 썩어버린 검고 깊은 커넥션, 기층민중을 호도하고 삭탈해 온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것을 두려워하는 이 땅의 ‘한줌도 안 되는 적폐들’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밖에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 정의에 대한 질량의 척도를 전혀 다른 저울에 올려놓고 그것이 ‘선의’임을 아무리 포장한다 해도 이미 그런 꼬임과 꼼수에 시리도록 훈련, 학습시켜준 이들이 바로 그들 스스로였다.
‘양심과 상식의 시대는 절대 저절로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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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구 사람사는 세상 워싱턴 메릴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