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주말의 망중한

2019-08-02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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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소나기가 물러간 후 하늘빛이 그윽하다.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토요일 오후 이유 없이 찾아드는 가벼움이 그냥 좋다. 평일보다 이른 퇴근길 물기 머금은 화사한 꽃들이 젖은 햇살을 쓸어내린다.

빗물 맺힌 빨간 장미의 촉촉한 입술을 훔치고 돌아서다 화단 둔 턱에 장대비로 허물어진 집터를 복구하는 개미들의 아우성에 발을 멈춘다. 땅거미 지기 전에 기초공사라도 마무리 하려는 듯 다급한 몸놀림이 일사불란하다. 더위에 지쳐있던 내게는 반갑기만 했던 소나기가 미물의 생명체에게 아픔이 된 현장을 미안하게 지켜본다. 다행스럽게도 개미들이 좌절하지 않고 씩씩한 군병들 같아 안심이 되었다. 집 모양이 빠르게 재건되어 가는 모습을 뒤로 하고 온 종일 햇살 혼자 놀다 떠난 빈 집으로 들어선다.

성급히 문을 닫고 습기 찬 신발을 구겨 벗으며 반바지에 민소매 셔츠도 서둘러 탈의를 한다. 구석구석 숨어있는 한 낮의 열기를 몰아내며 비늘같이 붙어있는 하루의 피곤함도 미련 없이 씻어 보낸다. 투자한 시간에 비해 가벼운 주머니 사정은 잠시 내려놓고 어둑한 창가에 서니 지켜주지 못하고 돌아섰던 개미들이 마음 쓰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지런한 개미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가다가 멈추고 뒤돌아 보면서도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개미로 살아간다. 육신의 수레가 무거울수록 행복이 쌓인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인가 잠시 정답 없는 생각이 스쳐간다.


이른 아침부터 삶의 음각이 오롯이 새겨진 공간이 일터라면, 낙서하듯 편하게 남은 시간을 정돈하고 에너지를 재충전시키는 가정이라 부르는 집이 있다. 그 집에서 주말이라는 이유만으로 까닭 없이 심신에 여유가 깃든다. 게으름을 피워도 조바심 나지 않고 너그러워진 마음 한 켠에 사소한 평안이 찾아온다.

가끔 그랬듯이 거실의 불빛 조도를 낮추고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얼음 주스 짜릿한 한잔으로 갈증을 달랜다. 티비 화면에는 멀리 떠나지 않아도 유쾌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승선표 없이 거대한 유람선에 올라 푸른 파도와 바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미지의 섬을 향해 도착하려는 순간 유람선이 사라졌다. 화면에서 밀려난 유람선 대신 멀리 고국에서 전하는 뉴스가 진행 중이다.

한참을 경청하던 남편의 정의에 찬 눈빛이 한 낯의 햇살처럼 이글거린다. 정치와 거리가 먼 내 귀에도 그들의 말솜씨가 마른 막대기 부딪치는 소리로 들린다. 말씨에서 배려라고는 찾아 볼 수 없으니 상대방과 잦은 다툼이 일어난다. 오해와 정쟁을 피하고 소통을 하려면 언어에도 쿠션이 필요하다는 진심 어린 충고를 전할 길이 없어 안타깝다. 오락 프로그램은 그런 면에서 뭉친 근육을 이완시키듯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갑자기 탄산수 같은 웃음 펀치를 날리는 남편 무릎 위로 두 발을 뻗어 투둑 올려놓는다. 부끄럽고 미안하기도 한 염치없는 행동을 뿌리치지 않아서 늘 고맙다. 못생긴 평발은 나의 신체 중에서 가장 피곤하고 감추고 싶은 오래된 고민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서있는 일터에서 열 받은 발바닥을 마사지 기계를 밀치고 남편의 촉촉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면 산 개울의 시원함도 부럽지 않다. 개미처럼 일을 하다가 잠시 쉬어가는 시간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소소한 믿음이 짙어진다.
한 시절 푸르다가 떠나는 계절이 아쉽지 않을 여름밤이 길게 자리를 편다.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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