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름 달래기

2019-07-05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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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뉴욕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 햇살이 아스팔트까지 녹여 볼 기세다. 불타는 한여름의 갈증이 습기 찬 목덜미를 휘감는다. 자동차 안의 에어컨은 달아오른 몸의 열기를 순식간에 식혀주지만 시원한 바람도 잠시, 달리다 보면 온 몸이 냉증을 앓는다. 최첨단 문명이 지배하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있지만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몸의 본능은 막을 수 없나 보다. 에어컨을 낮추고 차 창문을 내리니 후끈한 바람이 얼굴을 할퀸다. 번뜩 트렁크 뜨거운 바닥에 쌓아 둔 장바구니 걱정이 몰려온다. 갑갑한 비닐봉지 속에서 어린 잎사귀들의 아우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한 시간을 달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무사히 견뎌주기를 바랄 뿐 달리 묘책이 없다. 아이스 박스를 준비하지 못 한 때 늦은 후회만 에어컨 바람 속으로 밀어 넣는다.

허드슨 강바람에 너울거리는 물결은 서두르는 내 마음도 모르는 듯 한가롭기만 하다. 단골처럼 들르는 마트에서 이런저런 식재료를 탐했다. 계절에 맞는 건강한 밥상의 소임은 잠깐의 근심거리가 되기도 한다. 늘 그래왔듯이 물건이 빼곡한 매장을 한 바퀴 둘러본다. 지난주 들렀을 때 품절 되었던 열무가 야채코너에서 급하게 손짓을 한다. 오랜만에 만난 이웃처럼 반가웠다. 손대면 뚝 부러지는 열무 몇 단과 그에 따르는 부재료를 서두르듯 챙겨 담았다.

찹쌀 죽을 쑤어 붉은 고추 갈아 넣은 칼칼한 열무 물김치를 생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고인다. 넉넉하게 만들어 냉장고에 보관해 둔 열무 물김치는 더위에 지치고 입맛이 없을 때 상비약처럼 요긴하게 대접받는 이 계절의 별미이다. 새콤하게 잘 익은 건더기는 고추장과 참기름 한 방울 이면 맛깔스런 비빔밥이 되고, 쫄깃한 냉면이나 남편이 즐기는 국수 면발에 살짝 얼린 국물을 부어 주기만 해도 한 여름 무더위는 멀리 달아난다.
김치를 담고 남은 열무 잎사귀는 살짝 데쳐 찬물에 씻어 내면 나물로도 변신하고, 뚝배기에 된장을 넣고 조물조물 손맛을 첨가하면 구수하고 보드라운 열무 된장국으로도 손색이 없다. 식구들과 어느 식당에서 맛보았던 꽃게 된장 지짐을 하려고 조금은 냉동실에 저장해 두었다.


다행히 뜨거운 차 안에서 잘 보존된 열무 덕에 늦은 밤까지 부지런을 떨었다. 열무에는 비타민이 많이 들어 있고 세균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 주며 노화를 지연시키는 항산화 효과도 있다고 한다. 풍부한 베타카로틴 성분은 눈 건강에 효과적이고 사포닌 성분이 고혈압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철에 기력을 보충하는 무기질이 풍부하고 전분의 분해를 촉진시키는 효소가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으며 풍부한 식이섬유는 소화작용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변비를 개선하고 노화방지와 식이섬유의 포만감으로 다이어트 효과도 있다는 보고서를 읽고 여름 보양식의 새로운 발견인양 뿌듯하기만 하다. 삼복이 오면 여린 열무는 강렬한 태양에 다 타버린다고 하니 짧은 수확기가 너무 아쉽다.

우리 선조들은 계절에 따라 몸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보양식을 즐겼다.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철에는 뜨거운 음식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추울 때는 열을 내는 음식이나 기호식품으로 몸을 다스려 왔다. 자극적인 인스턴트식품이 유혹하는 계절이다. 입에 짜릿한 음식보다 자연에서 얻은 손수 만든 음식으로 건강을 돌본다면 특별한 보양식이 따로 있겠는가. 이열치열은 잠시 물려놓고 시원한 열무 물김치를 아낌없이 퍼내 불타는 여름을 달래 보련다.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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