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주에서 유관순을 만나다”

2019-03-05 (화) 노 려 웨체스터 지국장
크게 작게

▶ 기자의 눈

한국을 떠나온 지가 일제 강점기 기간만큼의 세월이다.
그 세월, 제대로 딸 노릇 못하고 지내다 몇 달 전 요양원으로 가신 어머니를 뵈러 한국에 갈 날짜를 잡을 때에는 3.1절은 안중에도 없었다. 올해가 100주년이라는 건 알았어도 어느 단체들의 행사 정도로 생각했다.

뉴욕의 한 친지로부터 3.1절 행사가 있는 공주로 오라는 초청을 받자, 하루 시간을 내어 몇 십년 만에 고속버스도 타보고 수 십년 전에 가보았던 공주가 어떻게 변했지 보며 기분 전환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공주에서 나는 강렬한 존재로 우뚝 서 있는 유관순을 만났다. 어린 시절 막연하게 부르던 유관순 언니를 아주 다른 모습으로 만난 것이다.

실은 지난해 뉴욕타임스에서도 유관순을 만나긴 했다.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될, 세상을 바꾼 여성들의 조문’기사였다. 여성 최초로 1995년에 에베레스트를 무산소 등정한 영국인 앨리슨 하그리브스(1962~1995), 영국 작가 샬럿 브론테(1816~1855), 초코칩 쿠키를 ‘발명’한 미국인 루스 웨이크필드(1903~1977) 등이 소개된 이 시리즈에 빛바랜 사진과 Yu Gwan-Sun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으나, 영어이기 때문일까, ‘한국 독립운동의 얼굴’이라고 소개된 유관순 스토리가 마음에 크게 닿지는 않았다.


유관순이 공주의 영명학교에서 공부한 것도, 유관순을 2년간 교육시켜 이화학당으로 유학 보내준 스승 사애리시 선교사도, 유관순이 1962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는 것도, 그리고 드디어 사망 100주년 되고 나서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는 것 모두 그날 공주에서 알았다.
3.1절을 기념할 마음도 없었던 내가 영명학교 학교 언덕에서 유관순과 스승 사애리시(Alice Sharp) 부부 세 명의 동상 제막식에서, 36년을 미국에서 살면서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때 울컥했다. 유관순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유관순을 키워준 사에리시 같은 선교사들의 존재에 대한 감사와 특히 그 옛날에는 차별받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한 두 여성에게서 감동이 전해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애리시 선교사는 미국 ‘북감리교회 해외여선교회’로부터 파송 받아 서울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교회에서 주일학교와 순회 전도자로 사역을 하다가 1903년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결혼하고 1905년 공주로 내려와 충청지역 최초의 근대학교인 영명학교를 설립하고,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애리시 선교사가 없었다면 유관순 열사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감리교 여선교회는 1869년, 비참한 삶을 사는 세상 여성들을 도와주기 위해 모인 여섯 명의 부인들로 시작해, 150년 후인 오늘에도 꿋꿋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이 행사에 참석하러 먼 길을 날아 온 미국 한인 감리교 여선교회 회원들을 보면서 실감했다.

유관순 언니와 사애리시 선교사가 발을 디디며 지나다녔을 영명학교 언덕에서 우울했던 마음이 전환되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는 나도 이 세상에서 좀 더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노 려 웨체스터 지국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