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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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

2019-03-04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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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은 유대이다. ‘정들자 이별’이란 말은 마음의 유대가 생기자마자 몸이 헤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번 맺어진 정은 몸이 헤어져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정이 유대이기에 정은 단결의 힘이 된다. 정은 무엇이나 접착시키는 마술 시멘트 같다. 그래서 정을 나쁜 무기로 이용하면 지연(地緣) 지방색 등 정치적 무기가 되기도 한다. 한국에 살 때 미국인 한 사람과 친구가 되었는데 오래 사귀어 정이 드니까 한국인 친구와 조금도 다름이 없이 격 없는 사이가 되고, 농담도 서로 하고 아무런 이색감(異色感)을 느끼지 못하였던 경험이 있다. 문화와 인종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정의 힘이다.

한국 식탁의 특색인 냄비가 바로 ‘정의 음식’이다. 양철이 생기면서 냄비가 보급되었지만 그 전에도 오지그릇인 뚝배기가 오랫동안 한국 식탁에서 사랑 받아왔다. 냄비는 본래 식탁에 하나만 놓고 온 식구의 숟가락과 젓가락이 드나들게 되어있다. 이런 점에서 냄비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정이 오가는 한국의 맛이다.

미국에 살면 냄비의 효과는 더 큰 것 같다. 부자나 모녀가 알몸으로 공동목욕탕에 들어갈 수 있었던 한국에서는 그래도 가족 사이에 구김살 없는 정이 통하는 기회가 있었지만 미국생활에서는 정의 통로가 참으로 좁다. 냄비는 식탁의 예절과는 거리가 멀다. 마음 터놓고 사귀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 하고 국물을 뜨겁게 마시는 것이 냄비의 깊은 맛이다.


술꾼들이 혼자서는 마른안주로 마시지만 여럿이 되면 냄비를 찾는 것도 냄비의 사회학을 알기 때문이다. 위생관렴을 따지는 사이라면 아직 사랑과는 멀다고 볼 수 있다. 정은 체면을 앞지르고 냄비 사회는 말라빠진 예의를 넘어선다.

정에 대한 생각은 자연히 연필과 연결된다. 옛날 필자가 어려서는 자기의 연필에 애착이 있고 정이 들었었다. 요즘 아이들은 연필을 깎을 때 기계에 넣어서 드르륵 돌려 버리니까 자기 연필에 정이 들 겨를이 없다. 그리고 지금은 연필이 무척 싸서 정이 들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서는 칼로 정성스럽게 연필을 깎았다. 그래서 내 연필 하나하나에 정이 있었다. 한국인이 자주 쓰던 ‘손때’라는 말도 정과 연결된 말이다. 무엇이든 내가 오래 써서 손때가 묻으면 정이 든다. 그러나 요즘은 스피드 시대여서 손때 묻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빨랑빨랑 시대’가 좋은 것 같아도 행복과는 멀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대만의 신학자 송성천(宋 誠天)박사는 동양신학의 공통점을 ‘울림’(Echo)으로 보았다. 한국악기인 퉁소 가야금 등은 모두 울림을 살리는 악기들이며 한국의 고전문학도 마음과 마음의 울림을 주제로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런데 울림이란 인간관계로 말하면 바로 정인 것이다. 동기간의 정, 이웃사촌이라 불리는 이웃 사이의 정, “구름도 쉬어 가는 추풍령 고개”처럼 낯선 나그네라 할지라고 막걸리 한 대접이가도 먹여 쉬어가게 하는 정으로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구성되었다.

지금은 물질문명과 개인주의의 발달로 한국적인 정이 많이 쇠퇴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회사나 교회나 이 정은 중요한 유대관계가 되어있으며, ‘정일랑 두지 말자’하고 노래하면서도 역시 한국인의 사랑은 계산보다 정이 앞서고 개인이나 사회나 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장 몹쓸 욕이 ‘인정 사정 없는 인간’이란 말이다. ‘정 떨어진다.’고 하면 더 이상 인간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정도 흥(興)도 영어 번역이 불가능한 한국어들이다. 그래서 그냥 Joung 이라 쓰고 설명을 곁들일 수밖에 없다. 진짜 한국인이 되려면 정을 터득해야 한다. 한국인 2세들에게 한글 교육보다 더 시급한 것이 정을 알게 하는 것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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