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기환 열사, 독립위해 삶을 던지다

2019-03-02 (토) 조원태/ 목사·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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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떠난 이민자들의 향수도 이리 깊은데, 나라를 잃어버린 사무치는 설움은 얼마나 깊었을까요? 일제의 잔인한 총칼을 앞세운 무단통치 10년, 태극기를 손에 들고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자주독립의 만세를 외친 선조들의 의연한 기개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때, 황기환 열사 당신은 해외에서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조국의 3.1 만세운동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1904년 10대 후반의 소년으로 미국에 망명한 당신은, 한인동포 1.5세의 뿌리가 되셨습니다.

타국에서 민족의 자긍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민자의 후손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당신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셨습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에 자원 입대한 당신은 유럽전선에서 구호병으로 전쟁 한복판에 서셨습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당신은 유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회의 서기장이 되신 황기환 열사 당신은, 나라 잃은 해외 한인 이민자들을 지켜준 고마운 대한의 외교관이셨습니다. 1919년 9월, 일제를 피해 러시아를 거쳐 영국에 건너왔던 한인 노동자들이 구제요청을 했을 때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강제징용을 당할 것이 뻔한 난민과 같던 해외 한인노동자들의 강제 귀국을 반대하는 고군분투의 노력을 당신은 다했습니다. 당신은 그 엄혹한 시절에 프랑스 노동부에 한국인 노동자들의 고용 요청을 해 주셨고 거절의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끈질기게 설득한 당신은 35명의 한국인들을 프랑스에 정착시켰습니다.

당신은 이민자보호의 표본이며, 이민자보호의 스승입니다. 당신은 유럽언론과 미국언론에 식민지배의 실상과 독립의지를 호소하는데 앞장서 줬습니다.

1923년 40세의 나이에 심장이 마비되어 하늘로 간 당신은 사랑과 정의가 마비된 이 시대에 여전히 살아있는 심장이십니다.

국권을 상실한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려준 민족의 스피커가 되신 당신, 아쉽지만 우리는 당신의 기록을 많이 갖지 못합니다. 당신 삶의 고귀한 발자취와 잘 생긴 훈남이었던 당신의 얼굴을 담은 고작 사진 몇 장만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유해를 품은 당신의 무덤이 오늘 우리 눈 앞에 살아있는 생생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흘린 눈물로 오늘 우리가 대한의 아들 딸로 자유를 누리며 어엿하게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슬픔을 정의와 사랑으로 바꿔준 당신의 무덤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스승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그립습니다. 당신처럼 독립을 위해 삶을 던진 분들이.

<조원태/ 목사·뉴욕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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