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별이 된 어린왕자

2019-03-01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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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설 명절을 코앞에 둔 인천국제공항의 미국 행 대합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한산했다. 그에 비해 동남아나 가까운 여행지의 항공사는 많이 붐비고 있었다. 몇 주 고국에 머무는 동안 한겨울이었음에도 강추위나 비바람이 없어 오가는 길이 순탄했지만 최근에 부쩍 심각해진 미세먼지는 피할 수 없는 복병이었다. 돌아오는 날 새벽 공항으로 향하는 서울 하늘에 적당히 뿌려주는 단비가 아쉬움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다시 만날 기약은 없었지만 기다림이라는 희망을 두 날개 가득 싣고 귀국했다.

넉넉하지 않은 시간을 쪼개 고국의 새로운 모습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이 곳 저 곳 분주하게 드나들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 뻗은 화려한 빌딩들,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질서 정연한 교통시설, 거리마다 활기차고 분주한 발걸음은 피곤한 여행자의 맥박도 덩달아 뛰게 했다. 지방의 어디를 가도 깨끗하고 친절하여 특별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복잡한 도시를 벗어 난 한적한 동네의 음식점에서도 긴 시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진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가정에서 직접 재료를 손질하고 음식을 만들어 손님을 맞던 시대는 지나간 일로 기억한다고 한다.

풍성한 외식문화는 잘 살게 된 고국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최신 유행이나 주관적인 멋을 강하게 어필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아직까지 내 의식에 멈춰있는 고루함은 멀찍이 내던져야 했다. 타국에서 고국을 향해 우려했던 국가 안보나 경제적 어려움, 정치적 불협화음의 난제들을 먼 나라의 귀 동양으로 여기는 듯 느꼈다면 황망한 착각이라 탓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것이 바뀐다 한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언제 달려와도 환호해 주는 친구들의 곰삭은 우정이 그렇다. 세월이 더할수록 묵향처럼 은근히 그리움을 달래 주는 마음지기들이다. 서로 다른 땅 위에서 삶의 음각을 나누었던 지인들과의 소중한 시간은 넉넉한 울림의 페이지로 곱게 접어 둔다.

서울의 중심부에 랜드마크로 떠오르고 있는 책으로 빌딩을 올린 만남의 장소를 찾았다. 이색적인 ‘별마당 도서관’은 생소하면서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꽂이에 진열된 책들을 자유롭게 꺼내 읽고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모습이 아름답게 각인되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과 책을 읽는 시간이 공평한 벤치의 풍경이 마치 거대한 그림책 같았다. 여학생의 안경 속에 투영 된 진지한 눈빛을 따라 나도 한 권의 책을 뽑아 들었다. 한 장 두 장 독백 속에 숨어 지낸 무수한 기억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지나간다. 틀에 박힌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기 두려워 머뭇거린 자리에는 굳은살이 말이 없고, 교정되지 않는 낡은 자판기를 두드리듯 삶의 언저리는 정체된 화면으로 부유하고 있다. 터치하지 않으면 자꾸 꺼져버리는 마음의 창을 두드리며 어린왕자와 책 속을 거닐었다. 바호밥 나무와 장미를 만나고 허영쟁이와 지리학자 노신사도 만났다. 사막위를 지나며 오아시스를 발견하고 순수를 만났을 때 어린왕자는 다시 별로 돌아갔다.

하루를 다 보내도 부족한 벤치에서 어느새 눈앞에 도착한 약속된 만남으로 책을 덮는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어린왕자를 만나 소유로 채울 수 없는 한 조각 갈망을 내려놓고, 돌아온 자리에서 책 속의 교훈을 되새긴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 서로 위하고 아껴야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이라는...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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