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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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어떻게 살았나?

2019-03-01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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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은 물론 전세계 어느 곳이든 한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100주년 기념행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100년 전인 1919년 3월1일 조선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입으며 어떻게 살았을까, 생활상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의식주 중에 먼저 자는 곳과 먹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몰려들어 용산, 마포 등지에 거주하면서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서 상업 활동을 펼쳤다. 조선인들은 종로를 중심으로 조선인 상권을 유지하고 거주지는 북촌이 중심이 되었다.

일본식 주택이 상당수 지어졌고 기와집, 돌집, 벽돌집, 콘트리트집, 초가, 움집 등등 다양한 형태의 주택이 있었다. 빈민층은 산언덕, 성벽 밑, 하천변에 가마니, 거적, 널빤지 등을 이용한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무얼 먹고 살았을까?
역시 합방 후 일본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신문 광고에 등장하면서 일식, 스시, 삐후스텍, 가쓰레스, 다쿠앙 같은 일본과 서양음식이 퍼졌다. 조선 지배층들은 이런 음식을 먹었겠으나 서민들은 구하기 힘든 소고기나 돼지고기보다는 개, 꿩고기, 참새고기에 채소, 젓갈, 장 위주로 식생활이 이뤄졌다. 기름이 귀하니 튀기는 요리는 극히 적었고 삶거나 찌는 요리법으로 국밥, 탕 등을 먹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커다란 사발에 고봉밥을 먹는데 이는 평소 고기를 잘 못먹으니 쌀, 콩, 보리, 조 같은 곡물에서 단백질을 얻은 것이라 한다. 밥그릇이 지금 우리의 2~3배다. 오죽하면 외국인 선교사들이 남긴 자료를 보면 ‘대식가의 나라 조선’이란 표현도 있다. 이것도 형편이 나은 집안 이야기이지 일제의 식량수탈로 소작민들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솔잎, 나무뿌리를 끓여 만든 죽(草根木皮)을 먹었다.

1885년 서울과 인천 사이에 최초의 전선, 1898년 전차 개통, 1902년 공중용 시외전화가 개통됐다. 1910~1920년 신문들은 과학문명의 시대가 열렸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봉건왕조와 양반들에게는 전신 전화를 비롯 전등, 전차, 라디오가 근대의 상징이었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다만 교육은 긍정적인 면이 많다. 1919년 무렵 조선시대 향학열이 만발하면서 여성들도 교육을 받았고 학교는 근대문명 수용 통로이자 이후 민족 운동의 온상이 되었다.

한편, 옷은 어떤 것을 입었을까?
일반 대중들은 전통복식이 대부분이지만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최초로 양복을 착용, 1895년 정부가 양복착용을 전면허용 했었다. 한일합방 후 양복, 양장이 보급되면서 근대교육을 받은 신여성은 단발머리, 흰 저고리, 검정 통치마, 양장을 입었다. 최초의 양장교복은 숙명여학교가 1907년 유럽 스타일 자주색 원피스를 착용했다. 그런데 1919년 3.1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여학생들은 양장 교복대신 다시 한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신발은 성별, 신분, 직업, 복장에 따라 종류가 달랐다, 남자들은 가죽신, 짚신, 여자들은 당혜, 미투리(삼으로 삼은 고운 신, 서민이하 부녀자들), 남녀공용 나막신을 신었다. 1908년부터 일본에서 고무신이 수입되었고 1912년 도시에서는 고무신 착용자가 보였으나 한국산 고무신은 1922년 대륙고무에서 첫 제품이 나왔다.

100년 전에도 동동구리무와 프랑스 코디사 제품인 코티분은 있었다. 1915년 포목점을 경영하던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경씨가 판촉용으로 만든 박가분이 있었고 국내수공업 업체에서 만든 연지, 동백기름, 밀기름이 4대 화장품으로 여성의 사랑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식민지 백성들은 어떤 생각으로 살았을까.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1919년 3월1일 세계만방에 내 나라를 찾겠다는 독립의지를 밝혔다. 그날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있다.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당당히 이 땅에 사는 우리들도 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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