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21일 한성 덕수궁에 계신 고종황제께서 “내가 무슨 음식을 먹었기에 이러느냐?” 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승하하셨다. 고종을 돕던 시녀 2명도 폭사했다. 새문안교회는 승하 일주일 후 1월 27일에 전교인이 모여 황제승하를 애도하는 특별예배를 드렸다. 3월 3일 고종황제 인산(因山)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10여 만명 가량 서울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19세기 중반부터 일본을 근대화 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고 침략전쟁을 준비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 국권의 일부를 찬탈하고 1910년 8월에 한국민족의 저항을 압살한 후 일본식민지로 병탄했다.
이에 관서북 지방에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주일예배 설교와 미션스쿨교육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기도하며 협력하여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계속 진행하던 중 서울과 기호지방의 감리교회들도 장로교회들과 같이 독립결사회를 준비했다. 상동교회 민족학교와 배재학당, 이화학당, 배화학당 등이 준비하고 있었다.
이즈음에 감리교와 장로교 지도자들은 통합하여 애국독립운동 시기만 노리고 있었는데 천도교측에서 기독교가 인재와 학교와 교회가 많으므로 합동해서 하면 어떻겠느냐고 이승훈장로에게 상의해 와서 함태영, 이갑성, 양전백 등의 동의를 받아 지도자들과 3차 회의 후에 4차 천도교와 합동회의를 통해 결정되었고 불교대표로 한용운이 백용성의 동조를 얻어 참여했지만 한용운이 지방사찰을 다녀 범어사까지 갔지만 모두 동의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독립선언서에 33인이 서명을 했는데 16인이 기독교, 15인 천도교, 불교 2명이다.
그 당시 나라인구가 1700만명이고 기독교인은 2%이다. 3.1정오에 탑골공원에서 정재용(경신학교 졸업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배재고보, 중앙고보, 휘문고보, 양정고보, 경신고보, 중동고보, 이화여고보, 숙명여고보, 진명여고보, 정신여고보, 연전, 보전 등 서울시내 5,000 여명의 학생이 모였다. 3.1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1,542회 궐기시위가 일어났고 참가인원은 2,029,848명 (독립운동 조사통계표 최남선:한국독립운동사 발취)이다. 이들 각 숫자 중에도 기독교 인구가 절대적으로 많다.
왜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는가?
그 이유는 성경에서 배운 가르침때문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3) 목사님들의 성서의 가르침은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이 주신 나라이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다. 기독교인은 대한민국이 하나님이 주신 나라로 믿는다. 그 나라는 일본이 지배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지배하셔야 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나선다. 창세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영적 현상으로 창조된 것을 믿는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가지고 산다. 일본의 침략행위는 조선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억압당하고 살게 했다. 일본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에 진리를 찾기 위해 나서야 하는 것이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중에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생활을 마감하고 독립하여 자유의 땅을 향한 행진과정이 나오는데 대한민국 민족에 비교하여 독립의 과정과 목적을 찾아 간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기독교의 진리는 자유와 평등이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독재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다. 교회에서 미션스쿨에서 기독교 진리를 배운 교인들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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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에스더/미주한인여성목회자협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