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의 무덤’

2019-02-01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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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적 내용이 담긴 말로 인해 명문대학 학과장직이 날아갔다. 한인자녀들도 다수 재학 중인 명문 듀크대학 생물통계학 대학원 학과장인 메간 닐리 교수가 최근 1~2학년생 전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문제가 된 발언이 나왔다.

“교수 2명이 찾아와 중국 유학생들이 학생 라운지와 스터디 룸에서 매우 시끄럽게 중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항의했다” 며 “유학생들에게 당부한다. 학교에서는 영어만 사용하기를 바란다”고 적은 것. 닐리 교수의 이메일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거센 비난이 일자 메간 교수는 “이 메시지로 많은 학생들이 화가 나고 상처를 입었음에 사과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 겸 대통령직속 신남방정책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1월28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CEO초청 조찬간담회에서 “50~60대는 할 일 없다고 산에 가거나 SNS에서 험악한 댓글만 달지 말고 아세안으로 가라‘는 발언으로 논란이 일었다. 그 다음날 그는 사직했다.


지금은 SNS 시대이니 매사 말조심을 해야 한다. 사방이 ‘적’이 아니라 사방에 CCTV가 깔려 나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록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특히 남들보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말 한마디 잘못하여 위상이 올라가기도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설화(舌禍)는 2004년 4.15 총선을 한달여 앞둔 정동영 당시 열린 우리당 의장의 “60, 70대는 투표 안해도 괜찮다.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된다. ” 였다. 한 언론사 대학생 취재단과 만난 자리에는 미래는 20대, 30대의 무대라는 의미로 한 말이지만 파장은 커서 당의장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야했다. 또 2010년 연평도 포격현장을 방문한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보온병’ 발언과 ‘자연산’ 발언으로 대국민 공개사과까지 했었다.
2016년 출간되어 현재 총판매 100만부를 돌파한 작가 이기주의 산문집 ‘언어의 온도’가 있다. 언어에도 따뜻하고 차가운 온도가 있다는 책 내용이 모두 좋았지만 그 중 경북 예천군에 있다는 ‘언총(말의 무덤, 言塚 )’ 에 대한 부분만은 외우고 싶었다. 여기서 언총은 달리는 말(馬)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言)을 파묻는 고분이다.

‘언총은 한마디로 침묵의 상징이다. 마을이 흉흉한 일에 휩싸일 때마다 여러 문중 사람이 언총에 모여, “기분 나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쓸데없는 말과 “그쪽 걱정돼서 하는 얘기인데요...” 처럼 이웃을 함부로 비난 하는 말을 한데 모아 구덩이에 파묻었다. 말 장례를 치는 셈인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다툼질과 언쟁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

이 부분을 읽고서는 인터넷으로 경북 예천의 말 무덤을 찾아보았다. 실제로 500여년 전부터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말 무덤이 있었다. 이 마을은 원래 문중끼리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문중 어른들은 모두 사발 하나씩을 가져와 말썽 많은 말을 뱉은 다음 그 사발을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때부터 마을에서 싸움이 사라지고 평온해졌다고 한다. 예천군은 현재 선조의 지혜가 담긴 말 무덤을 산교육장으로 꾸몄다.

‘삼사일언(三思一言), 세 번 생각한 다음 말하라( H 애덤즈)’는 말이 있다. 하나둘셋을 세는 동안 말의 강도가 약해지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느끼면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때때로 너무나 무성한 말잔치가 한인사회에 돌아다니는 것을 볼 때 뉴욕한인사회에도 그 돌아다니는 말들을 파묻을 ‘언총’이 필요하다싶다.

사람은 평소 입버릇대로 산다고 한다. 칭찬, 축복, 감사의 말은 자신도 기분 좋고 상대방도 기분좋게 만든다. 불평, 험담, 거짓말은 그 주위에 어두운 기운이 가득해 누구나 가까이 가기 꺼린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 내 말의 온도는 몇 도일까요? ” 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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