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찹쌀떡의 추억

2019-02-01 (금)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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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인적 끊긴 눈서리 시린 밤에 멀리 골목길 끝에서부터 가까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찹쌀떡!”이라는 외침이 어떤 날은 청아하게 어떤 날은 찬바람에 부서지듯 스산하고 구슬프게 들렸다. 나는 새우깡이나 컵라면 같은 간식거리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쇠창살 없는 쪽문이 열리고 낯선 목소리와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잠깐 들리는 듯싶다가 귓가에서 멀어져 갔다. 아버지는 지나가는 찹쌀떡 장수를 창가 가까이 불러 세우고 긴긴 겨울밤의 참을 준비했다. 그런 찹쌀떡을 나만 빼놓고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드셨다. 두 분은 이불 속에서 새근거리는 나의 모습만 보고 깊이 잠든 줄 알고 깨우지 않으셨다. 야속한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벌떡 일어나면 미안해하실까 봐 점점 새우등이 되어 자는 척해야만 했다.

아버지에게는 예식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는 전문 주례사를 정해 놓은 예식장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주례를 맡을 지인이나 스승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예식장의 배려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다른 사업을 하시면서 친구의 예식장에 파트타임 직원으로 협업하게 되었다. 주말마다 결혼식이 있었고 계절에 따라 하루에도 여러 차례 결혼식이 있어서 그때마다 아버지는 주례를 맡았다. 그때는 소박하게 잔치를 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절이어서 겉치레보다는 예의를 중시했다. 조용하면서도 경건한 예식장 분위기에 맞게 아버지의 주례사는 간결하면서도 교장 선생님처럼 훈시적이었다.

서울 도심에도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수용하고 피로연을 할 수 있는 넓은 식당이 없었다. 결혼식이 끝나면 혼주의 친척들이 하객들에게 찹쌀떡 담은 나무도시락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모찌’라고 부르며 입가에 하얀 가루가 묻어도 창피한 줄 모르고 그 맛에 끌려 아버지의 주례 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주례선생님에게 건네는 답례품은 포장지부터 달랐다. 나무도시락도 일반 하객용보다 세배 정도 컸다. 나무도시락에는 일반 도시락에 없는 분홍색과 하늘색 찹쌀떡도 들어 있었다. 하객에게 돌리고 남은 나무도시락까지도 커다란 보자기에 싸서 주례의 손에 들려주었다. 밀가루로 만든 꽈배기나 무지개 사탕 같은 구멍가게 간식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찹쌀떡을 아버지 덕분에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하루 다르게 신제품이 출시되고 먹을거리가 넘쳐나서 탈이 따르는 세상이다. 소아비만이나 성인병 대부분도 부족함보다는 넘쳐남에서 오는 질병이라고 한다. 내남없이 절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분수에 맞게 생활하고 남 앞에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며 처신하기란 쉽지 않다. 본보기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과욕과 무절제한 생활로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자들의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면서 비애에 젖기도 한다. 내게 주어진 삶을 잘 다루어야겠다. 살아온 세월 동안 쌓인 노력이나 경험으로 이룩된 숙련만큼 지혜의 척도를 가늠하는 잣대가 길어져서 모두 측정하고도 남는 넉넉한 마음 갖길 원한다. 그 또한 나에게 과욕이 아니길 소망해 본다.

오랜만에 집에서 찹쌀떡을 만들어 보았다. 찹쌀을 불려 밥을 해서 절구통에 찧었다. 팥을 몰캉하게 삶아서 속을 만들고 동그랗게 만들어 보았다. 비슷하게 만들어진 찹쌀떡의 맛은 그 옛적의 맛에 미치지를 못했다. 기다림과 꾸밈없는 감격으로 마주하게 되었던 찹쌀떡을 다시는 못 먹어 볼 것 같다는 생각에 그 겨울 골목길에 울려 퍼지던 “찹쌀떡!”을 외쳐본다.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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