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선의 예수교 탄압

2019-01-2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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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李朝)는 소위 ‘4대 박해’를 통하여 수 없이 많은 조선 예수교인들을 죽였다. ‘4대 박해’란 신유(辛酉 1801년)박해, 기해(己亥 1839년)박해, 병오(丙午 1846년)박해, 병인(丙寅 1866년)박해를 가리킨다. 개신교보다 100년 전에 들어온 가톨릭교회는 심한 박해를 받고 수많은 순교자를 냈다. 조선의 초대 신부 김 대건(金 大建)신부를 위시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죽어갔다.

이조(李朝)는 예수교를 사학(邪學-그릇된 학문)으로 규정하고 사학퇴치령(邪學退治令)을 내렸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안 지내고, 위패(位牌)를 금한다는 것이 처벌의 주요 이유였다. 위패란 죽은 사람의 이름을 나무패에 적어 집에 모시는 신주(神主)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위패를 안 모신 집은 무조건 잡아들인 것이다.

일제(日帝) 강점(强占)시대, 조선의 예수교도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는 죄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제암리교회(수원) 몰살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일본 육군 79연대(아리타 중위 지휘)는 남자교인만 21명을 교회 안에 가두고 밖에서 못질을 하였으며 불을 질러 몰살하였다. 한 시민이 서울까지 달려와 아펜젤라 선교사에게 알려 그가 현장에 가서 찍은 사진 기록이 미국 선교본부에 남아있다.

유관순의 순교는 너무나 잘 알려졌다. 천안에 살던 겨우 17세의 시골 처녀가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교도소에 갇혔으며, 인두로 가슴을 지지며 “이래도 예수를 믿고 독립만세를 부르겠느냐?”고 위협하였으나 이 어린 소녀는 믿음과 독립에의 열정을 버리지 않고 순교하였다.

금년이 유관순 순교 98주년이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국 기독교순교자 기념관’에 가면 이러한 모든 순교 기록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최근 역사에서 북한에 살던 기도교도들이 국군의 1.4후퇴 때 대거 남하한 사실은 잘 알려졌다. 북한에는 교회가 없다는 말이 맞는다. 선전을 위하여 몇 교회가 있으나 어디까지나 보이기 위한 것이며 신교(信敎)의 자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남한으로 빠져나온 기독교도들이 많은 교회를 세운 것이 남한 땅에 교회가 갑자기 많아진 이유이다.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은 약 200만 명이다. 그들 중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목숨 걸고 내려왔으므로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북한의 사회구조는 한 마디로 하면 경제면에서는 ‘집단화 체제’, 정치적으로는 김 일성 일가의 우상화(偶像化) 체제, 사회면에서는 ‘중앙집중지도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경제면에서 그들은 1954년 이후 농상공(農商工)의 개인 경영을 없애고 집단화하였다.

가령 농업을 예로 들면 농가 30세대 정도를 한 그룹으로 전국을 세포화 하였다. 만일 이 집단화에 참가하지 않으면 각종 제재가 가해지므로 참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조직은 1958년에 완성되었다.
집단화 체제가 종교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집단화 체제에 들어간 사람의 프라이버시(Privacy 사생활)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요일이 반드시 휴일이 아니라 집단에 따라 휴일을 제각기 정하기 때문에 일정한 날의 종교행사는 있을 수 없다. 10일에 하루를 휴일로 삼는 집단도 있다.

북한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중앙당 집중지도>라고 불리는 전 주민 재편성이었다. 이 조직은 1960년에 완성하였다, 전 주민의 사상과 성분 (成分) 등 김 일성 체제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가려내어 반체제 분자를 감시한 것이다. 조사의 내용은 세밀하고 광범위하였다. 월남가족 유무, 반공단체 가입유무, 종교유무, 지주 혹은 친일파가 아니었는지? 남한에 고향을 두지 않았는지? 등이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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