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레를 막아선 사마귀!”

2018-09-18 (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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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이 속담은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석게 덤비는 것을 뜻한다. 철딱서니 없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덤비는 짓을 비유해 쓰이는 말이다.

이 속담에 등장하는 하룻강아지의 원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대부분은 그저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강아지’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룻강아지는 하릅강아지가 변한 것이다.

‘하룻’은 ‘하릅’의 변형이다. 하릅은 개, 소, 말 등과 같은 짐승의 ‘한 살’을 지시하는 단어다. 그러니 ‘하룻강아지’는 한 살 된 강아지‘인 셈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은 “한 살 된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다. 흔히 강아지가 생후 일 년이면 천방지축 까불고 겁 없이 짖어댈 때이니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는 꼴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인사회엔 자신을 범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꽤 있다. “깜”도 안 되면서 자기세상인양 설치는 이들이 그렇다. 잽도 안 되면서 아무에게나 덤벼드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주제파악도 못한 채 남만 험담하는 이들 역시 그러하다.

영혼을 팔면서까지 “쩐”만 쫓아다니면서도 떵떵거리는 졸부(?)들도 매한가지다. 이들은 “억지-큰 소리”가 무기라 여긴다. 그러니 아무 곳에서나 앙앙거리고 짖는다. 누구에게나 멍멍거리며 대든다. 온 세상이 자기의 큰 소리 앞에서 쩔쩔맨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범이 아니라 하룻강아지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참으로 자신의 주제파악도 못한 채 날뛰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과 비슷한 한자숙어가 당랑거철(螳螂拒轍)이다.

이는 춘추시대 제나라 장공이 수레를 타고 가는데 사마귀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수레를 막아섰다는 고사에서 비롯됐다. 공연히 허세를 부리거나 제 힘이 모자람을 돌아보지 않고 함부로 덤빈다는 뜻이다. 그러니 강한상대에게 무모하게 덤비지 말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당랑거철은 분수를 모르는 이에게 자주 사용된다. 왜냐하면, 급이 다른 상대에게 무턱대고 덤벼들면 낭패 보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수를 알고 처신을 삼가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너 자신을 알라”, “네 주제파악을 하라”는 얘기다.

“너 자신을 알라”, “네 주제파악을 하라”는 말은 “네 꼴을 알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다.
‘꼴’은 모습이라는 뜻이다.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 사람의 모양새나 행태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어떤 형편이나 처지 따위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꼴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이지 않다. 그런 모습(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할 때 ‘꼴불견’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모두 보기 싫다는 의미인 ‘꼴사납다’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꼴은 상대방의 모습을 비하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모자란 자기 수준에 딱 맞는 행동을 한다는 의미로 비꼬면서 쓰이는 “꼴값을 하다”는 표현이 그렇다. 그러니 “꼴좋다”는 표현도 칭찬이 아니다. 잘난 척을 하더니 그 모양이 되었다는 비웃음의 표현일 뿐이다. 꼴값을 하네, 꼴값을 떤다는 아주 기분 나쁜 말이다. 더욱 기분 나쁜 말은 “꼴값을 떨고 있네.”라는 표현이다.

각설하고, 꼴은 외형적 모습과 내면적 모습 모두를 일컫는 말이니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꼴(모습)을 자신이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꼴은 모르면서 남의 꼴만 보고 험담하는 습성을 갖고 있으니 문제다.

우리 주변엔 ‘꼴값을 떠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남의 허물만 캐러 다닌다. 남이 나보다 잘되는 꼴은 두고 보지 못한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자기중심적 사고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꼴이다. 참으로 자신의 꼴은 못보고 한심한 짓거리로 나대는 꼴은 보기 흉하다. 이처럼 경거망동하는 이들은 큰 코 다치기 마련이다. 경솔하여 생각 없이 망령되게 행동하는 것은 파멸을 자초하는 자살행위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색의 계절이 오는 길목에서, 혹시 스스로가 범 무서워하지 않는 하룻강아지나, 수레를 막아선 사마귀는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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