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육칼럼

2018-02-21 (수) 대니얼 홍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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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 언어 게임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연습할 때 소통의 어려움을 겪었다.같은 한국어를 사용했지만 남한과 북한 팀이 사용하는 스포츠 용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슛은 쳐넣기, 패스는 연락, 리바운드는 돌입쳐넣기, 블락샷은 뻗어막기 등으로 달랐다.

통역이 필요한 수준임을 인식하고 대한 아이스하키 협회는 단일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아이스하키 남북 용어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스포츠에서의 언어 사용과 이해 차이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좁힐 수 있고, 실제 경기에서는 선수들이 말 보다는 몸 움직임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사회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최근, #미투 캠페인을 통해 사회 각처에서 쏟아지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호소와 고발을 향해 가해자들은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였다.

며칠 전, 한국의 모 대학 연극학과 교수이자 배우가 자신의 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피해자는 교수가 내 가슴을 만졌다고 주장하며 그 상황을 구체적으로 서술했지만, 가해자로 주목받은 교수는 “가슴으로 연기하라고 손으로 툭 친 걸 가슴을 만졌다고 학생이 진술한 것이다”라며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했다. “가슴”이란 단어를 연극학과 교수는 격려 차원의 심볼로 해석했지만, 똑같은 단어를 피해자는 공포와 수치심의 근원으로 여겼다.

지난 해, 한국의 일부 대학생들이 “새따(새내기 따먹기), 씹던 껌 단물 다 빠진 게 좋노, 샷으로 존나먹이고 쿵턱쿵, 가슴은 D컵이지만 얼굴은 별로 니 봉지 씌워서 하자”라는 낯 뜨거운 구절을 사용하며 여대생들을 성노리개로 삼는 문자를 카톡 그룹 채팅방에서 주고받은 사건이 있었다.

문제의 대학생들이 고발당했을 때 그들은 일관성 있게 반응했다. “우리는 문자로 장난치고 있었다. 진담이 아니라 농담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아는 여대생들의 실명까지 들먹이며 노골적인 문자를 교환한 것을 단순한 장난,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특히, 피해자의 입장에서. “장난, 농담”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매개체 역할도 하지만, 언어 성폭력의 맥락에서는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벼락을 맞은 것 같아요, 벼락 맞았어요” 라는 표현은 아 다르고 어 다르듯 분병히 다르다. 만일 벼락이 사람처럼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난 그냥 생각없이 아무데나 내리쳤는데…”라고 말할 것이다.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기자회견에 나온 당시 치안 본부장의 거짓 증언,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는 입장이 벼락의 시각이요, 성폭력 가해자들의 입장이다.


결국, 성폭력 가해자들은 오스트리아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 게임을 즐기고 있다.

뜨거운 목욕탕 물에 들어가면 어떤 이는 “아 시원하다”로 어떤 이는 “앗 뜨거”로 다르게 표현하는 것처럼, 언어 게임 이론은 똑같은 단어와 행위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반응이 서로 다르게 나오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아마도, 그런 언어 게임을 가장 스릴있게 즐긴 사람은 빌 클린턴일 것이다. 클린턴은 대통령 재임시 백악관의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탄핵의 도마 위에 올라갔었다. 그 위기를 회상하며 부인 힐러리는 회고록을 통해 “그 때 남편을 반갑게 맞이했던 가족은 우리집 개밖에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클린턴은 “오랄 섹스는 성관계(Sexual relation)가 아니다”라는 언어 게임을 교묘히 즐기면서 탄핵의 위기를 모면했다.

#미투 캠페인이 확산되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클린턴처럼 언어 게임을 즐기며 빠져나갈지 두고 볼 일이다.

<대니얼 홍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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