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추석을 서울에서…”

2017-10-24 (화) 노 려/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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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눈

서울은 참 평화스럽다. 미국에서 겪던 그 혼란이 없다. 긴장을 조장하던 트럼프도 김정은도 이곳에서는 조용하기만하다. 텍사스의 허리케인도, 푸에르토리코의 허리케인도 라스베가스의 대량 살인 사건도 머나먼 나라의 일이다.

뉴욕에서 떠날 때 비행기가 만선이라서 놀랐다.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에게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통보가 있었다는 것이 페이크 뉴스였나?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비행기 안을 꽉 메우고 있어서, 전쟁 소리에도 무릅쓰고 90 노모를 만나러 고향을 찾아가는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10일 동안의 추석은 더없이 서울을 조용하게 만들고 있었다. 추석 이틀전부터 차들이 서울거리를 쌩쌩 달린다. 이번 추석에도 100만이 빠져나갔다고 했다. 이제는 ‘민족의 대이동’의 목적지가 외국까지 포함되고 있지만 서울이 텅 비는 건 훨씬 더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학창시절, 시골에 친척이 없던 나는 “자, 빨리 4대문을 닫자. 이사람들 다시 서울로 들어 오지 못하게…”라고 했었다. 그렇다. 텅빈 서울거리는 그 때 추석맞이 특선 영화를 보러 갈때 느끼던,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핵폭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데, 사람들은 그 추석을 철저히 지키고들 있었다. 추석 하루 전부터 웬만한 식당은 다 문을 닫았고, 어딜가나 ‘추석연휴 잘 보내세요.’메모가 붙어 있다. 9일, 월요일에 은행에 갔는데 문이 닫혀있었다. 한글날이었다. 하지만 한국사람들이 이렇게 평화스런 겉 모습과는 달랐다는 것을 소설가 한강의 뉴욕타임스 글을 읽고 알았다. 추석 선물로 ‘비상 응급용품’들을 주고 받았다는 것이다.

모슬림이라고 하면 잔뜩 긴장을 했던 미국에서와는 달리 추석전날 밤 어느 TV에서 이란 영화 ‘참새들의 합창’을 방영했다. 지구 상에 가장 위험한 나라인 이란의 변두리 서민생활. 마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처럼 주인공은 오토바이로 사람을 실어 날라주며 악착같이 돈을 벌고,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물고기를 잡으며 즐겁기만하다. 바로 몇 킬로만 북쪽으로 가면 존재하고 있는 북한 아이들의 삶은 어떨까? 로보트처럼 정해진 표정으로 정해진 말만 하며 살고 있을까? 김정은 감정 따라 폭탄이 어디로 날아갈지 불안한 지금은 그나마 활동을 하던 북한 인권 단체들이 숨을 죽인듯했다. 남한 사람들한테서 헐벗은 북한 동족에 대한 우려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식당이 문을 닫아, 드시고 싶은 냉면을 못 드신 노모와 피자를 시켜 먹으며 본 추석 특집의 주제는 ‘추석준비하는 여성들의 불만’이었다. 딸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는 시어머니, 일이 다 끝날 무렵 나타난 동서, 전혀 도와주지 않는 남편……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이런 갈등은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는걸까. 떠나기 전날 월북 작가인 근원 김용준 전시를 보러 찾아 간 성북동, 꼬불꼬불 골목길의 헌 기와집들, 평양 만두집, 누추한 가게들… 내 어린시절 돌아다니던 바로 그 거리였다.

뉴욕에 돌아오니 트럼프와 김정은에 아프리카 나이저까지 덧붙인 전쟁이야기가 풍성하다. CNN을 보며 내 고향 풍성한 추석가절의 고요함과 평화스러움이 서서히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노 려/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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