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다. 연애하기 좋은 때다. 지난여름 10년~30년만에 전 직장동료들을 만났다. 대부분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거의 미혼으로 20대 청춘을 함께 보낸 사이다.
이날, 사진국장 출신인 선배는 서초동에서 돼지껍데기·손두부집을 운영하면서 오랜만에 한국에 간 본인을위해 연락되는 선후배들을 모두 불러저녁식사 자리를 제공했다. 장대같은비가 오는 날 10명이상이 일찌감치모여 늦은 밤까지 박장대소하며 회포를 풀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거나 주름살이 깊어진 선후배 동료들은 소설가, 방송작가, 인터넷 방송인, 심리치료사, 평론가로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이런 저런현재 안부를 묻고는 곧장 30년 전 함께 일하던 과거로 돌아갔는데 각자의연애사를 아는 처지라 바로 말이 통했다.
그 시절을 함께 한 두 사람이 이미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공채 동기생인남자기자는 문장력이 뛰어나 늘 반짝이는 기사를 썼는데 그 감성이 넘쳐나면 몇날 며칠이고 잠수를 탔다. 그 와중에 결혼했다 이혼하고 동거하고 헤어지고 다시 인연을 찾고, 첫 월급을탔는데 그의 월급이 여기자들보다 2만원쯤 많았다. 일하다말고 사라져 찾아보니 직장 옆 구멍가게에서 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실상 나는 그것이별 상관이 없었는데, 그는 홀로 미안해서, 맨 정신으로 깨어있을 수 없었던것. 그렇게 마음이 약하더니 술을 끼고 살았고 간경화로 일찍 갔단다.
또 한명은 후배 사진기자, 그는 사내연애를 엄청 공들여 했는데 상대방의마음이 변한 것 같다며 엉엉 울면서상담을 해왔다. 결국 편집국내에서 상대방의 뺨을 쳤고 그날로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이 엄청난 스캔들의 주인공은 이후 스튜디오를 차려 돈을 잘 벌었으나 마음이 병들어선지 췌장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아직 20대 미소년이 하소연하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살아있는 우리들은 옛날이야기를하며 사랑이란, 아, 사랑이란 무엇인가가 궁금했다. 그때 미술평론가 S는종이를 달라고 하더니 일필휘지로 시를 썼다. 조선시대 여류시인 이옥봉의‘운강에게 드림’이라는 시로 사랑하는 이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담겨있다고 설명한다.
‘ 님이시여 어찌 지내시나요/ 창문에 달 비치면 새록새록 님 그리워/꿈길에 가는 넋이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면 / 님의 집앞 돌길은 닿고 닿아모래밭이 되었을 것이외다. ’한문‘ 근래안부문여하/ 월도사창첩한다/ 약사몽혼행유적/ 문전석로반성사’ 중에 내가 아는 한문이 몇 개나 있던가, 다른 옥봉의 시를 알려달라고 하자‘ 규정(閨情)’ 이라는 시를 소개했다.
“이 시를 들으면 밤새도록 울지 않고는 못배길 걸. ” 하길래 나도 울 준비를 해야 하나 싶었다.
“ 봄이 오면 오시겠다 다짐했었지/매화마저 지느니 봄도 가누나/ 홀연히 들려오는 까치 소리에/ 헛되이 거울 보며 눈썹 그렸소.”임을 기다리며 몇 번이고 그려진눈썹을 지우며 서러움에 눈물 흘린다는 여인의 애틋한 마음을 소개하며이옥봉의 기구한 삶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조원이라는 선비와 결혼하며 글을 짓지 말라는 약조를 했으나 10년후 남을 돕고자 시 한편을 썼다가 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평생 남편을 그리며 시를 지었고 시는 옥봉의 사후명나라에서 시집으로 발간되고 당대최고의 시인으로 불려졌다.
그때 손자손녀를 둔 할배이면서 몸만들기에 여념 없는 사진기자 출신건물주는“ 우, 질려. ” 하고 대뜸 옥봉의 시를 물리쳤고 본인은 S의 한문실력과 감성에 놀라서 그 종이를 달라고 하여 뉴욕으로 갖고 왔다. 시는문학의 최고봉이라 한다. 본인은 시에대해서 잘 모르고 시를 쓰지도 못한다. 그런데 S로 인해 시가 궁금해졌다.
이날, 수십년 만에 만난 우리들은언제 또 만날 지 모르지만 다같이 사랑을 이야기했다.‘ 삶은 결국 에로스(Eros:남녀간 사랑), 아가페(Agape:신의 사랑), 필리아(Philia:부모, 우정, 예술적사랑) 어느 것이든 사랑하면서산다는 것’에 암묵리에 동의했다. 그리고 언제나, 지금은 사랑하기 좋은 나이라는 것도 깨우쳤다.
<
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