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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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상

2017-10-06 (금)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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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부족한 잠이 문지방을 넘으며 길게 하품을 흘린다. 하루의 씨앗이 되는 아침이 덜 익은 떫은 감 맛이다. 푸석한 얼굴에 급하게 손자국을 남기고 달려가는 시간을 따라나선다. 어제까지 끌었던 친근한 샌들에서 시선을 거두고 신발장을 열었다.

오랜 시간 침묵한 자리에서 반겨주는 시월의 구두에는 지난가을 미완의 그림이 남아있다.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잔설처럼 묻어있다. 밤새 땅바닥으로 몸을 던진 도토리가 날 밝은지도 모르고 누워서 키 재기를 하고 있다. 꼭지 모자를 눌러 쓴 도토리와 민머리 도토리가 옥신각신하다가 다람쥐 구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몇 개를 주워 호주머니에 감추려다가 비밀 알아챌 것만 같은 하늘 올려다보고 멋쩍게 웃어 본다.

매사에 진중한 성격 탓으로 소리 내어 웃는 일보다 미소로 대신하는 버릇이 있다. 자주 웃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부정적 감정이 적다고 한다. 웃음은 평생 가까이 두는 상비약이라고 하니 이제부터라도 유쾌한 웃음으로 긍정적인 감정도 되찾고 건강도 챙겨야겠다. 나무는 젖은 이슬로 새 옷을 갈아입고 부는 바람을 견디지 못한 낙엽은 내 가는 길을 내어준다.


분주한 소슬바람은 소리 없는 언어로 내게 말을 건네자마자 거리의 가로등 곁을 지나 슬픈 이별을 노래한다. 때로 뜨락의 수목 화초는 가는 빗줄기 속에서 한 폭의 엷은 수묵화가 되어 모든 색과 형상을 포용하고 내 곁에 남는다. 나는 세상 모든 색깔과 무채색의 의미를 깨닫지 못해 여태껏 자유롭지 못한 시간에 머물러 있다. 잠들어 눈뜨지 못한 채 비틀어진 꼭지들 틈에서 나팔꽃 한 송이가 인사를 한다.

구름 떠나보내고 새들도 사라진 위태로운 그물 벽에서 불면의 밤을 지키다가 예정된 시간에 용케도 눈을 떴다. 잎은 아래로 땅을 깨우고 꽃은 구름 위로 솟을 듯 기상나팔을 울린다. 그 소리 장엄하여 가까이서 들을 수 없지만, 생명의 소리임엔 틀림이 없다. 생동하는 계절의 아침 기운이 소망으로 모이고 벽시계의 우회전이 하루를 이끈다. 굽어진 길을 돌아서 완성을 이루는 시침은 가야 할 길이 명확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땅속 나무뿌리도 많은 꺾임을 감내하며 척박한 환경에서 성장하듯이 땅 위의 나무도 적당히 휘어야 아름답고 빛이 난다. 돌아가기를 거부하다 익숙한 장소에서 머리를 찧고 아픔보다는 곧은 목이 미워서 서러울 때가 있다. 화석이 된 고집에 이끼가 끼어 돌아서 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순탄한 길에서 시행착오를 겪거나 역경에 직면한들 한 조각의 기쁨은 남아있다.

바람이 없는 세상에서는 꽃도, 잎도, 나무도 될 수 없듯이 고난과 맞서지 않으면 어두운 터널을 지날 수 없다. 불평 없이 찬 이슬을 털고 아침의 영광을 맞이하는 나팔꽃의 기쁨으로 마음의 창을 여니 산 넘고 여울 따라나선 가을의 속살거림이 가까이에 머문다. 먹구름 비집고 나온 반쪽 햇살은 두고 온 채워지지 않은 달을 한가위 만월로 키우느라 뒤척였든지 수척한 기색이다.

고향의 밤이며, 대추며, 감 익어 가는 소식이 석양빛보다 황홀하다. 넉넉한 가슴으로 찾아가 수확의 기쁨을 함께할 수 없어 높아만 가는 파란 하늘가를 여념 없이 머뭇거린다. 시계의 분침이 반원을 그리며 느릿한 시침을 건너가려 할 때 오래 알고 지낸 손님이 “굿 모닝, 좋은 아침!”을 외치며 가게 문을 들어선다.

청량한 그의 목소리가 일터의 시작을 알린다. 열린 문틈으로 따라 들어온 윤기 없는 잎새 하나가 눈에 밟힌다. 이 가을에는 구르는 잎새도 책갈피에 끼우면 고운 인연이 된다. 흔들리며 여물어 가는 가을 곁에 주변의 모든 것을 붙잡아 두고만 싶다.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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