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감이 일시에 몰려든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파면된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형사 피의자로 전락해 심문을 마친 뒤 구치소로 호송됐다. TV로 생중계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감 모습을 보는 순간 엄습해온 것은 허탈감과 피로감이었다.
지지부진한 듯 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전광석화 같이 느껴진다. 최순실 비선농단 진상이 처음 언론에 보도된 데서부터, 촛불시위, 특검수사, 탄핵, 그리고 구속에 이르기까지 지난 6개월의 과정이.
카르마(karma), 업보(業報)라고 하나. 그 단어가 정수리를 무섭게 짓누르는 것 같다. 비극으로 맞이한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거기에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 최태민이라는 사람이 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최태민의 딸 최순실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돌아오지 못할 길, 정치적 사망을 맞이한 것이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비극적이다. 그리고 그 2대에 걸친 얽힘이 운명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이다. 큰 재해 1건이 발생하려면 29번의 작은 재해와 300번의 사소한 사고가 발생한다.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하던가. 취임 초부터 경고음에, 사고연속이었다. 그러나 번번이 무시되고 묵살됐다. 그 와중에 등장한 신조어가 ‘박근혜 번역기’다.
소통을 안 하려든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뭔가를 이야기하려했다. 그런데 그 발언이 너무 독특하다. 신비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온 말이 유체이탈어법이니 영매(靈媒)어법이니 하는 것들이다.
이제 와서 보니 사유(思惟)의 세계가 달랐던 것이다. 민주정치의 핵심은 설득의 정치다. 말은 민주주의에서 필수적이다. 민주주의를 전혀 체득하지 못했다. 아니, 그의 사유체계는 민주주의와 동떨어져 있다. 그러면서 주술의 세계와 통해있었다고 할까. 그러니….
그의 언어는 계속 꼬여갔다. 그러면서 반복된 것이 헌법 위반이고 국정농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돌아볼 기회는 수차례 주어졌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지적했듯이 언론을 통해, 의회의 권고를 통해. 그러나 계속 무시했다. 거기다가 거짓말로 일관했다. 결국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준 상처는 여간 깊은 게 아니다. 헌법가치는 유린되고 민주주의는 퇴보했다. 그 뿐이 아니다. 최태민에서 최순실 2대에 걸쳐 주술과 탐욕으로 점철된 미신적 세계인 것이 박근혜 권력의 심층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한국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멸감에 수치감까지 안겨준 것이다.
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결국 구속 수감됐다. 그러면 사태는 이로써 일단락 된 것인가.
그는 국민을 속인 거짓에 부끄러워하고 있을까. 최소한 속였다는 사실정도는 인정하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정말로 엮인 것이고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어느 질문에 YES라는 답이 나오는지에 달린 것이 아닐까.
결국 사죄는 없었다. 대통령으로서 통합과 치유를 위한 메시지는 더구나 없었다. 언론 보도, 국회 청문회, 검찰 수사, 그리고 헌재 심판을 통해 드러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완강히 부인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했다. 그리고 차갑게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수감됐다.
무엇을 말하나. 여전히 전혀 잘못은 하지 않았다는 확신에 차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말이 아니다. 헌재의 판결을 승복할 수 없다. 영어(囹圄)의 몸이 됐지만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자신에게 적용된 뇌물죄 등 13개 혐의도 억지로 역은 것이라는 무언의 불복메시지를 통해 뭔가 불퇴전(?)의 결기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그 분노의 대상이 날로 넓어진다. 처음에는 촛불이 그 대상 같았다. 그러던 것이 언론, 야당은 말 할 것도 없고 같은 편인 것 같은 자유민주당도 그 분노의 대상이 됐다. 헌법재판소도, 대한민국 헌법 그 자체도 적으로 돌릴 기세다. 그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이 조작이고 종북세력의 용공행위다. 태극기부대라고 했나. 박사모 등 일부 극우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보이고 있는 행태다.
그 모습이 그렇다. 확신이 지나쳐 맹신에 차 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어른거리는 것은 ‘나에게 결코 오류는 없다’는 듯이 입을 꽉 다문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이다.
문제는 진박(眞朴)으로 분류되는 제도권 내 정치인들도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검찰 수사와 헌재 판결에서 드러난 사실조차 ‘조작’ ‘왜곡’이라고 어깃장을 놓고 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헌법마저 부인할 태세다.
유난히 추웠다. 그리고 꽤나 길게 느껴졌다. 촛불로 수놓아졌던 그 나날들이 어딘가 위태위태해 보여서였나. 그 겨울이 끝났다. 이제는 춘분(春分)도 지나 청명(淸明), 한식(寒食)이 내일 모레다. 봄이 마침내 온 것이다. 그런데도 어쩐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심정이다.
‘아스팔트를 피로 물들이겠다’-. 10%도 안 되는 그 극우세력에 여전히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면서 보수 맹주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 그것이 유치장에 갇혀 있는 박 전 대통령의 여전한 꿈이고 진박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바람이라는 소식이 들려와 하는 말이다.
그 결과는 그러면 무엇일까. 그나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보수 세력의 말살이다.
한국 보수 세력의 최대 위해세력은 좌파도, 종북 세력도 아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 그러면 특정 프레임에 가두고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박정희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는 전 근대적인 사이비 보수 세력. 그들이 바로 최대 위해세력이다.
한국의 보수가 새로 태어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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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세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