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테러 몰아내기

2016-09-19 (월) 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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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1일은 9.11테러 사건 15주년을 맞은 날이다. 지금 서른다섯이 된 장년도 그 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였을 것이니 많은 사람들이 뉴욕에서 일어났던 그 끔찍한 사건이 기억에 별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알려졌던 맨하튼의 세계무역센터가 아랍계 테러분자가 조종하는 항공기 두 대의 자살 충돌로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3,000여명이 죽는 대참사였다.

그 당시 TV는 아랍 국가들의 거리 풍경을 보여 주었다. 어른 아이들이 거리에 나와 뉴욕의 테러를 축하하며 춤추고 노래하던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도대체 저 아이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테러를 찬양하는 것일까? 하기야 이 세상에는 독재자를 맹종하는 국민들, 빗나간 교주를 맹신하는 종교인들, 전쟁을 찬양하고 테러분자를 영웅시한 역사도 적지 않았다. 어쨌거나 폭력을 정당화하고 폭력을 가르치는 것은 주의, 사상, 신앙, 체제를 막론하고 악마적인 죄악이다.

금년 들어 북한은 연이은 두 번의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그들의 미사일은 소형 핵탄을 부착하고 시카고에 달할 수 있다고 하니 미국 대선의 큰 이슈가 될 것이다. 인류의 역사 발전이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농민의 땀에 의한 것이라는 인류학자들의 보고는 오늘의 세계에도 큰 교훈을 준다. 억세고 강한 자가 이기는 것 같고 그들이 문명을 이끄는 것 같아도 결과적으로는 평화롭고 부드러운 자들이 발전의 요소가 되며 승리한다.


바웬사는 노벨평화상 수상연설에서 말하였다. “인류의 문제들이 반대자를 제거하고 남의 머리를 잘라냄으로 해결되리라는 잘못된 기준을 버려야 한다. 폭력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도 노벨 평화상 수상연설에서 외쳤다. “폭력을 쓰지 않는 것만이 현대의 혼란한 정치와 도덕에 대한 해결책이다. 압제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또 다른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 비폭력은 아프고 괴로운 과정이지만 거기에만 속량(贖良 Redeem)의 힘이 있다.” 미국의 토마스 에름돌프 의원은 하원 커뮤니케이션 분과에서 이런 보고를 하였다. “미국 아이들은 TV를 통하여 18세가 되기까지 1만8,000건의 살인을 감상한다. 강도 방화 총질 등 폭력에 속한 장면을 매분 한 건씩 보게 된다. 드라마의 75%는 폭력을 포함하고 있다.“

무장한 폭도들이 예수를 체포하러 왔다. 제자 중 한 사람이 칼을 뽑았으나 예수는 그를 말리고 “칼은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유명한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런 교훈도 말씀 하셨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9) 폭력은 싸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눈 흘김 한번이 증오의 씨가 될 수 있고,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과격한 언사, 남의 속을 긁는 말, 모욕적인 행동, 부정적 비평 등이 모두 폭력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면서 인류에게 남긴 진리는 사랑이 폭력을 이긴다는 단순한 한 가지였다.

맹수들도 동족끼리 싸우지만 죽이기까지는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맹수보다 더 독하다. 방울뱀은 치명적인 독침을 가졌지만 저희들끼리 싸울 때는 절대 독침을 사용하지 않는다. 개싸움을 보아도 한편이 꼬리를 내리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싸움은 수십 년 동안도 계속하지 않는가! 이런 점은 사람이 오히려 동물에게 배워야 한다.

폭력의 출처는 범위가 넓다. 증오심과 복수심에서 폭력으로, 집단이기주의에서 폭력으로, 권력과 우월감에서 폭력으로, 돈벌이와 욕심 채우기와 사회 불만에서 폭력으로 등 폭력의 가능성은 한없이 확대된다. 한국의 70년 근대사에도 얼마나 많은 폭력이 난무하였는가! 간디의 말대로 “폭력과 테러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

<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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