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2016-09-03 (토)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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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 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 하누나~가을이라 가을바람 다시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같구나 추운 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 하느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백남석작곡, 현제명작곡의 가을을 노래한 동요다.

9월이 되었다. 무더웠던 긴 여름이 한 풀 두 풀, 꺾이며 아침저녁으론 제법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이번 여름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너무나도 더웠던 계절이었든 것 같다. 어쩐 일인지 미국의 뉴욕과 한국의 서울은 계절을 같이 타나보다. 뉴욕이 더우면 서울도 덥고, 서울이 추우면 뉴욕도 춥다. 겨울이 없는 LA는 예외이지만.

가을을 기도한 김현승은 이렇게 노래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계절의 가을도 가을이지만 우리네 인생에도 가을은 찾아온다. 인생을 4계절로 비교해 보자. 태어나서부터 25세까지를 봄, 26세부터 50세까지를 여름, 51세부터 75세까지를 가을, 76세부터 100세까지를 겨울. 지금 당신은 어느 계절에 머무르고 있는가. 허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못 속이는 게 나이 아니던가.

가을은 시인을 만들고 시인은 가을을 노래한다고 누군가 말한다. 아직은 떨어지는 낙엽이 없지만 이제 조금만 지나면 푸르고 검었던 나뭇잎들은 누렇게 색깔이 변하며 한둘 떨어지게 된다. 떨어져 밟히는 낙엽들을 보며 모든 사람들은 시인이 된다. 시인이 뭐 다른가. 가을을 느끼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시인이 되는 거지.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져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살이 찌도록 마련해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날을 베풀어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해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단맛을 돋구어 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집을 짓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외롭게 그러합니다/ 잠이 깨어,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나뭇잎이 떨어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사이를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가을날’ 전문이다.

동네 전철 밑에 이곳저곳을 번갈아 돌아가며 앉아서 물끄러미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백인의 노숙자 한 명이 있다. 한 여름 더울 때엔 웃옷을 벗어서 깡마른 그의 윗몸을 드러낸 채로 여름을 난다. 이젠 그도 가을을 타겠지. 그에게 가을은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겨울을 준비해야 할 가을, 아님 자신을 돌아볼 가을, 아님 또 무엇일까.

그래도 그는 쓰레기통은 뒤지지만 구걸은 하지 않는다. 먹다 버린 음식으로 그는 또 가을을 체우고 아침저녁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겠지. 누군가 읽다 버린 뉴욕타임지를 읽는 그. 그의 가을은 몹시도 쓸쓸하지 않을까. 아니, 그렇진 않겠지. 아마도 가을을 가장 좋아할 수도 있을 것.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고, 계절도 그를 간섭하지 않기에.

어는 시인은 말한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겁니다.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러며 그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남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삼가고,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좋은 행동으로, 자신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나가야겠다고 적는다.

천고마비,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가을의 시작이다.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며, 기도하고 사랑하게 하는 가을, 열매들이 무르익어가는 가을, 잠이 깨어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쓸 수 있게 하는 가을, 무엇보다 인생을 느끼게 해주는 가을이다. 또 전철 아래서 무심(無心)을 캐고 있는 백인 노숙자의 가을도 있음에야.

<김명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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