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이란 스스로 하는 거라지만,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거나 동조해 주지 않는 자랑은 수치일 것이다. 어떤 저명한 철학자가 인생은 철드는 65세부터 75세까지가 가장 좋은 때라고 했는데, 나야말로 이제 서야 철드는지 내 삶을 돌이켜 보니, 어쩌면 자랑할 것 하나 없이 잘난 체 지금까지 살았나 싶어 얼굴이 화끈 거린다. 별 지식도 없으면서 아는 체 등 온갖 체를 하며 자긍심이라면서 뻔뻔히 살았으니 남들에게 얼마나 꼴불견이었을까!그러나 나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떳떳이 자랑할 수 있는 올해 100세인 우리 엄마가 계신다. 일찍이 양찬언 목사(한국 장로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알려진 경북 경산 사월교회에서 목회하셨던)의 막내딸로 주일 예배 중 일경에게 멱살잡이를 당해 교회 강단에서 끌려 내려오 는 부친을 보며 아픈 성장기를 보내고, 결혼 후 일경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 항상 쫓겨 다니는 남편과 같이 민족의 온갖 고난의 역사를 목사 딸로, 또 목회자의 아내로 겪으며 칠남매를 키우신 우리 엄마.
그 시절 누구나 다 겪은 고생을 새삼 자랑이라 하느냐고 힐난할지 모르지만 그런 중에도 우리 엄마는 달랐다. 엄마는 평생을 눈, 비가 와도 새벽기도를 쉬지 않으셨고, 새벽기도회 후 부엌에서 아침을 지으며 울먹이다가, 힘차게, 또는 흐느끼듯 부르시는 찬송가를 듣고 나는 매일 엄마의 기상도를 알았다.
그 찬송들 중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네”라는 찬송은 유년에서부터 지금까지 늘 내 귀에 쟁쟁하고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엄마는 가시밭에서 백합화처럼 살았다.
작년 만해도 생신 축하연에서 영어권 교우들을 위해 영어성경 구절을 암송하셨고, 지난봄 까지도 새벽 다섯 시면 벽을 보고 꿇어앉아 두 시간씩 기도드리고 저녁이면 꼭 일기를 쓰셨다. 엄마의 일기는 우리 집 가족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는데 그렇게 깔끔하고 규모 있는 엄마의 일상이 무너지고 지난 여름부터 병원이 엄마의 집이 되고 말았다.
그 여름 엄마는 필라에서, 나는 LA에서 입원을 했다. 엄마의 병상은 딸 여섯에 막내로 낳은 삼대독자 내 남동생이 지켰고, 나의 며칠 병상은 내 큰 아들이 지켰는데 피곤함을 감추고 엄마 간호를 하고 있는 아들이 안쓰러워 가슴 메이는 고통은 진통제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가까이 있는 딸들의 보살핌 보다 아들의 간호가 특효약이다. 사회적으로, 교회 일로 어느 누구보다 바쁜 환갑 나이의 아들이 삼끼를 병원을 들락거리며 “엄마, 나한테 이랬지? 이제 내 차례야”라며 아기처럼 달래가며 한 수저씩 먹여주는 음식만 겨우 넘기시니 말이다.
동생은 “엄마를 평생 안방에 모시고 살았지만 엄마와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는데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극진히 간호하지만, 누나들과 자형들, 주위의 지인들은 동생 걱정을 더 하고 있다.
엄마가 잠에서 깨어나 잠시 정신을 차리고 오랜만에 본 나도 알아 볼 때 “엄마, 아들 애 먹이지 않으려면 많이 드시고 정신 차리셔야 해요”라고 하면 비몽사몽간에도 그 말에 자극을 받고 음식을 넘기려 애쓰셨다. 엄마는 그 아들을 두고 어떻게 떠날 것이며, 우리 막내는 어떻게 엄마를 보낼 수 있을까!“처형, 글쟁이라면서 어머니 정신 맑으실 때 지난 얘기들 좀 써놓으시지.” “설마 엄마가 저렇게 정신 놓으실 줄 알았나.“ 나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후회만 되고, 별 도움이 되지 않아 돌아왔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늘 엄마는 나의 자랑거리였고 지인들이 “엄마 아직 살아계 셔?”라고 물으면 “네 아직 증손 이름까지 낱낱이 불러가며 기도하시는 데요”라며 은근히 뻐겼었다. 엄마 자랑 없어지면 나 어떡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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