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깊어진 가을밤 산성 서문 오르자 파노라마같은 잠실벌 야경 한눈에
▶ 북장대~청량당 코스선 단풍도 만끽
세계유산 남한산성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2007년 작가 김훈이 펴낸 소설‘ 남한산성’의 서평이다. 김훈은 1636년 경기도 광주의 산성 안에서 일어났던 인간군상의 갈등과 고뇌를 유려한 문장으로그려냈다.
김훈이 소설을 펴낸 후 7년이 흐른지난해 남한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고 또 한 해가 흘러 기자는 남한산성을 찾았다. 능욕의 현장은 역사적 유산으로 거듭났고 햇볕이 좋은 가을날, 원색의 등산복을 입은 관광객들은 400년 전 인조와 성안에서 항쟁하던 민초들의 자취를찾아 성곽길을 걷고 있었다.
◇남한산성의 야경
남한산성은 성 자체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유적이다. 성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당연히 낮에 와야하지만 산성 서문에서 내려다보는 잠실 쪽의 야경 역시 압권이다.
야경을 보기 위해 기자가 남한산성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9시. 한낮에오가던 관광객들은 자취를 감추고 이따금씩 헤드랜턴을 준비한 등산객들의 발길만 이어지고 있었다. 기온도뚝 떨어져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이차가웠다.
어둠이 내린 국청사를 지나 남한산성의 서문을 통과하니 문루에 세워 놓은 깃발들이 바람을 못 이겨 펄럭이고 있었다. 성문을 나와 50m쯤남쪽으로 향하자 나무에 가리지 않아 전망이 탁 트인 포인트가 나타났다. 북쪽을 바라보니 발아래로 잠실벌의 야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있었다. 잠실의 야경을 보는 순간 중국 상하이의 야경이 떠올랐다. 상하이의 가이드들은 니콘이나 삼성 같은다국적 기업들의 네온사인이 남중국의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는 사실에자부심을 느끼는 듯했지만 기자의 눈에는 번잡스럽고 어수선할 뿐이었다.
그에 비해 남한산성에서 본 서울의밤 풍경은 조용하고 시크한 도회의처녀 같은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낮에 본 남한산성
국가사적 57호인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다. 다음 날 찾은 남한산성은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알록달록한 등산복을입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남한산성 탐방코스는 다양하지만행궁을 둘러보고 북문(전승문)까지올라간 후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북장대터→ 연주봉→ 서문→ 수어장대→ 청량당을 거쳐 남문 주차장으로 내려오면 1시간30분쯤 소요된다.
남한산성은 성벽의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또 몇 개의봉우리를 연결해 축조됐다.
단체여행객들을 따라 북문 밖으로나가보니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가팔랐다. 해설사는“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고도 350m 내외의 구릉성 분지인데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천혜의 요충지로 외침에 정복당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천혜의 요새라면 인조는 왜 산성을버리고 나와 삼전도 땅바닥에 머리를찧으며 항복했는지 대답 없는 남한산성은 북쪽으로 한강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행궁
남한산성 행궁은 전쟁 중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 궁궐을 대신할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인조4년(1626)에 축조된 건물이다. 정무시설과 다른 행궁에는 없는 종묘사직위패 봉안건물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의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다.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 상궐·좌전이 복원됐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유적이다. 자료에 따르면당시 행궁에는 내행전인 상궐과 좌우 부속건물, 익랑 등 72칸 반, 상궐의 삼문 바깥에 외행전인 하궐과응청문, 내삼문 등 154칸이 있었고행전의 동편에는 객사인 인화관이있었다.
“인조가 행전에 머물렀으며 숙종과영조, 정조가 영릉 참배시 이곳에 머물렀고 유수의 아문이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보아 처음에는 역대 왕들이 실제로머물렀던 곳이었지만 후일 유수의 치소(治所)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