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아봉공(無我奉公)

2015-08-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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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예리 <교무 • 리치필드 팍 거주>
언제나 그렇지만 요즈음 같이 각박한 세상에 우리들에게 절실히 더 필요한 덕목이 바로 무아봉공이 아닐까 싶다. 특히 공인이라고 자처하거나 그 위치에 있거나, 공공기관에 근무하거나 종교인들에게 더더욱 요구되는 내용이라고 본다. 아니 사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과 실천이 바로 무아봉공일 것이다.

한국어 사전에는 ‘무아란 자기의 존재를 잊는 것.’ ‘봉공이란 나라나 사회를 위해 힘써 일함.’이라고 해석되어 있다. 이와 비슷한 말로 ‘극기봉공(克己奉公)’이나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말도 있다. 모두가 자기를 이기거나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힘써 일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할 것 없이 서로 관계하는 데 있어 마찰과 불화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이기주의에서 오고, 상대를 생각하지 않는 자유방종의 행동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원불교를 포함한 불교에서는 이런 불화와 이기심의 근원에는 곧 ‘나’라는 상(我相)이 자리하고 있어서라고 본다. 이 아상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몸과 마음이 영원한 나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며 그 집착이 결국 나만 위하게 하고 내 가족 내 자식만을 위하려는 생각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 말은 결국 작은 나에 집착하여 큰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작은 살림에 집착하여 큰살림을 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나라나 사회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대단히 편협할 수 있어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무아봉공은 원불교에서 추구하는 신앙과 수행의 궁극적 목표로 교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리서인 『정전』에서는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利他的 大乘行)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신은 전무출신의 기본 정신으로 자리매김 하였고 본인도 원불교의 교무가 되어 무아봉공의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반성하며 매일을 점검한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석가ㆍ공자ㆍ예수 등 수많은 대성자들이 시대를 따라 세상에 나오시어 혼탁한 세상인심을 바로 잡고 인류가 평화의 성지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인도하셨다. 그런데 그러한 대성인의 곁에는 반드시 그 법을 받들고 보필하는 훌륭한 제자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들이 바로 불교 석가불의 십대 제자(十大弟子)요, 유교의 공문십철(孔門十哲)이며, 기독교의 예수 십이사도(十二使徒)이다. 원불교에서는 소태산의 구인제자가 바로 이런 인물들이다.
1916년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던 한국의 궁촌벽지 영광 땅 백수면 길룡리에서 소태산의 큰 깨달음으로 원불교가 시작되었다. 소태산은 그 후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중 9인을 선정하였고 그 9인의 제자들은 스승과 함께 하나하나 무아봉공을 체험하고 실천해 나갔다. 변변한 기구도 없던 시대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버려진 간석지에 제방을 막아 농토를 만들어 국가사회의 생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그 때 얻어진 농토에는 현재 연방죽과 유기농 벼농사를 하고 있으며 그 이익금은 교육사업의 유지와 발전에 쓰이고 있다. 또 방언공사 중에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소태산과 구인의 제자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로 기도하여 백지혈인의 인증도 받았다. 그 날이 8월 21일이고 우리는 법인절이라 칭하여 기념하고 있다.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심대 제자나 공자님의 십철들이나 예수님의 십이사도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의 구인제자들 그분들을 생각하면 참 신기하고 감사한 맘이 든다. 오래전 성현들의 보필지사들도 그렇거니와 특히 소태산의 구인제자들의 무아봉공은 내가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생겨난 일이라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전라도 영광 땅, 그 토끼와 발맞춘다는 간고한 산골에서, 모두 근동에서 나고 자라고 심지어는 소태산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나름 스팩도 갖추고 있던 분들과 혹은 무산자요 무식하였던 분들이 섞여서 얼마나 스승을 믿고 자신의 신념에 자신이 있었기에 두 마음 없이 언을 막고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기도를 할 수 있었는지 참 궁금하다.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해도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일했고 공부했고 자신을 바르게 건사했고 무아봉공을 실천하신 분들이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100년의 원불교 역사가 있고 미래가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 100년대의 주인공이 되어 무아봉공을 목표로 살아가는 내 자신이 참 고맙고 이 인연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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