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리의 거실화

2015-08-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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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사랑방 손님’이라는 예쁜 소설이 있다. 한국의 사랑방이나 안방을 소개하려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잘못 설명하면, 그 뜻을 바람직하지 않게 전할 수 있겠다. 사랑방은 사랑채에 있는 남편이 사용하는 방이고, 안방은 안채에 있는 아내가 쓰는 방인데, 여기에 가족이나 손님이 모이게 된다. 이 지역의 우리가 말하는 리빙룸 즉 거실도 가족이나 손님이 모이는 장소이다. 우리들은 집안이나 바깥에서 일처리를 위한 모임이 필요하고, 일없이 모이는 것도 즐거워서 그런 장소를 찾는다.

“저 브로드웨이 34가에 오시면, M백화점 앞 넓은 광장에 테이블과 의자가 많이 있습니다. 거기 어딘가에 앉아 계시면 만나 뵈러 가겠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손님을 만나 뵙는 장소를 이렇게 알려드렸더니,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내게는 그곳이 바로 거리의 응접실이다.


하루하루 그런 장소가 점점 넓혀진다. 이미 42가 타임스스퀘어부터 시작하여 23가 남쪽으로 뻗어갔다. 사람들이 길 중앙의 녹지대에 마련된 이런 장소를 애용하는 모습이 제각각이다. 혼자서 신문이나 책을 읽는 독서실로 쓰기도 하고, 또는 친구와의 만남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식당이 되어 몇 사람이 담소하며 식사하는 장소가 된다. 오늘 새로 발견한 사실은 이런 장소가 남북으로 뻗더니, 드디어 동서로 퍼지기 시작한 사실이다. 어느 틈에 별로 넓지 않은 길의 반쯤을 앉아서 쉬는 자리로 만든 것이다.

그동안에는 시내에 편히 앉아서 쉴 자리가 없었는가. 여기 저기 수없이 많은 것이 식당이나 다방이다. 그렇다면 한길 가운데 자리 잡은 쉼터는 무엇이 다른가? 우선 조망할 수 있는 범위가 다르다. 위를 보면 끝없이 하늘로 이어진다. 좌우를 보면 넓은 길이 뚫려있고, 복잡한 차와 사람의 왕래가 재미있게 보인다. 거기에 본인이 앉아있는 의자는 편안하고, 앞에 놓인 테이블은 가지고 있는 물품을 올려놓거나 일하기에 알맞아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곳에 앉아서 쉬려면 이리저리 둘러보아야 한다. 어디에 빈자리가 있나, 빈자리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은 어디인가. 여기서 할 일에 적당한 자리는 어디인가... 등등을 생각하면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여기에 자리 잡고 있으면 더 중요한 변화를 느끼게 된다. 첫째 어느 누구하고나, 무엇하고나 친구가 된다. 눈에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또한 비치된 물건들을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서로 친구가 되어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즐거움이 있다. 거기서는 다른 사람과 같은 테이블을 사용하거나, 쓰레기를 같이 치우는 일이 자연스럽다.

한길에서 생활을 즐기는 근본은 무엇인가. 자유 선택의 즐거움이고, 그 가치이다. 어린이들에게 크레용을 집어줄 것이 아니다. 그의 자유 선택의 기쁨을 뺏게 된다. 그들에게 어느 옷을 입으라고 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골라 입도록 이끌어 가는 것이 좋다. 어느 대학의 무슨 과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일은 없을까? 언제나 어른의 사고방식이나 의견만이 옳을까? 그럼 자녀들이 어떻게 각자의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될까? 그 과정에서 부닥치는 실패는 값진 영양제가 될 것인데…….

필자는 지금 무한대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한길 오늘의 내 자리에 앉아서 미래를 즐기고 있다. 바로 세상과의 소통이다. 그런데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다음에는 겨울이 온다. 거리 한복판에서 매번 즐기던 내 자리는 어떻게 되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게 없어지면 다른 자리를 찾으면 된다. 왜? 인생은 결코 꽉 막히지 않는다. 자주 변동이 있어서 재미있고, 그 변동이 파도를 거치면서 생각과 생활이 달라짐은 더욱 흥미롭다.

우리가 살아나가는 즐거움은 여럿이 같이 산다는 것이다. 거기서 오는 번거로움이 한층 더 즐거움의 열도를 높인다.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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