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가 믿는 것

2015-08-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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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영 <병원근무>

근무하는 병원 응급실에 환자가 실려 왔다. 몸이 바람 꽉 찬 풍선같이 퉁퉁 부운 데다가 혼수상태다. 혼비백산하여 함께 온 남편 말로는 몸에 좋다고 하여 상항버섯이라는 것을 먹었는데 저 모양이 되었다고 했다. 의료진이 단숨에 위세척 등을 하고 약물 투여를 하니 정신을 차린 듯 깨어나 여기가 어디냐 하고 묻는다.

하루가 가기 전에 모든 치료를 끝내고 퇴원하는 환자를 보며 재빨리 응급처치를 안했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고 담당의사가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그런 미련한 짓일랑은 다시는 하지 말라고 콩박을 주며 바래다보니 꼭 남의 일만은 아니다. 오래 전,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일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는 보따리 장사라는 아줌마가 이따금 들렀는데 그의 커다란 가방 안에는 외제 물건이 항상 가득 했다. 새알 초콜릿부터 리츠 크래커니 색색이 맛이 다른 깡통 속의 동글동글한 알사탕 등이 단골 메뉴였지만 그 이외에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외제 화장품이었다.

지금에야 최고급 백화점에 한국 화장품 코너가 자리 잡고 있는 만큼 뛰어난 품질이 세계적이라 해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 시절이지만 그때만 해도 외제화장품을 구하는 것은 이 보따리 아줌마를 통하지 않고는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금색의 꽃 모양 도장이 찍혀있는 노란 동그란 통에 들어있는 코티분 하나와 레브론 로션 하나 사서 바르면 당장 미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도 되었다. 거기다 분홍색 립스틱 하나면 외제 화장품 사용자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았다.

미국에 온 지 한참 지난 후, 나는 드럭 스토어에서 내가 화장품 아줌마에게서 구해 아껴 바르던 파란색 크림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지금은 미인 기준이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얼굴 피부색은 무조건 하얘야 했다. 뽀얗게 하얀 얼굴에 후까시 잔뜩 넣어 올린 머리 스타일은 멋쟁이 소리를 들어도 손색이 없었다. 모양새만 보아도 효과가 날 듯한 이 외제 화장품은 워낙에 뽀얗고 흰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내게 항상 탐나는 메뉴다.
“ 매일 아침 세수하고 나서 한번, 저녁에 세수하고 나서 자기 전에 또 한 번. 몇 달만 지나면 얼굴이 눈같이 하얘져요.”

주머니가 비었으면 빚이라도 내서 장만해야 했다. 꾸준히 얼굴에 바른 그 세월의 덕으로 내 누런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이 얼굴 표백제 크림을 드럭 스토어에서 발견했을 때는 오랜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햇볕에 그을은 색을 더 좋아하여 일부러 돈 주고 선탠 룸에 누워있는 이 나라 사람들 중에도 흰 피부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나보다 생각하며 겉의 설명서를 유심히 읽어보았다. 아마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또 계속 발라 희고 뽀얀 얼굴피부를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제일먼저 들어온 단어는 클린징이었다. 얼굴에 바른 후 더운물로 씻어내면 된다는 설명이다. 그 작은 글씨를 아무리 끝까지 들여다보아도 피부를 희게 해준다는 설명은 없었다. 즉 비누대신 세수할 때 쓰는 클린저인 셈이다.

이 크림을 바를 때에도 알파벳 정도는 읽을 수 있을 터인데 화장품 장사아줌마를 철썩 같이 믿어서일까 아니면 예뻐진다는 말에 정신이 빠져 버린 것일까. 왜 감히 읽어볼 생각도 안했을까…. 황당하다기보다는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부끄럽고 무식했던 과거 행적에 헛웃음만 나왔다.

수년간 보물처럼 아끼면서 희뿌연 클린징 크림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미제 립스틱을 바르면서 미제 화장품 애용자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그 시절은 이미 저 멀리 가고 없지만 잘 견뎌온 내 얼굴이 고맙기만 하다. 그나마 병원에 실려 가는 참사를 당하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할 것이다.

예뻐진다, 몸에 좋다. 이보다 더 솔깃한 단어가 있을까? 몸에 좋다는 말만 믿고 버섯의 성분도 모르는 채 먹고 병원에 실려 온 사람이나 예뻐진다는 말만 믿고 클린싱 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활보하는 행태나 무식한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허상의 정체는 무식에 근거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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